우리나라는 주자학의 나라인가?
정말이지 제임스 라스트, 폴 모리아보다는. 하는 기분. 라스트도 거짐 다 정신 사나운 것들이나, 글을 쓸 때 베토벤의 로망스를 들으면, 우리나라는 주자학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불쌍한 대마도. 사람이 없어서 깨끗하고. 늘 언제나 중일도 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도 마쯔리도 하고, 마쯔다, 하는 모습이 안탑깝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본이 불쌍한 것은 전통이 있는 것이다. 왜구가 침략한다는 것도, 같은 암호로 보면 될 것이다. 왜구였다가, 정식 군인이었다가, 왜구였다가, 정식 군인이었다가. 정식 군인이 왜구였다가, 아무런 철학적 기반이 없는 것이다. 다만 불쌍한 것이고, 그래도 천불천탑, 아니 불쌍한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전지역에 제법 빼곡해진 것이다. 헐벗고, 아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있어도, 일본어가 따라주지 않는다. 마음은 죽음 앞에 은혜로워도, 샤미센이 늘 언제나 따라주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어쩌면 왜구는 정식 군인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명나라를 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주라기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원나라가 지금의 러시아 땅 비슷하게 경영하다가, 다시금 땅을 나눠주는 것이 그처럼 템포가 아름답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일본 같았을 것이다. 약소국가. 지역국가. 반도국가. 늘 언제나 몽고나 거란, 명나라 청나라의 침입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었는데, 갑자기 이성계나, 최영, 광해군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붙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장군들은 자의식이 없는 것일까? 장군들은 사병들이 불쌍하지 않는 것일까? 임전무퇴. 라스트가 걸리고, 주자학의 나라가 선포될 무렵, 가서 싸워야 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가장 나이 많은 임금이, 임금이 되어 왕위를 물려주고, 가까운 군사들과 싸움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완벽한 노장사상에서도, 우리는 도덕경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기 상태에서, 누군가 음악을 연주하면, 피리를 불면, 종이가 그렇게 무겁지 않기에, 누군가는 꼭 만년필을 가져오기에, 책도 가져왔는가 물으면, 책도 가져왔기에, 전장에서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음악회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설교도 할 수 있는 것인 것이다. 십만 대군을 만나, 오천명이 깨지더라도, 국내에서보다 그것의 문화가 더욱 밝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십만 대군이 도리어, 오천명의 문화인들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어쩌면 전 세계의, 인간 무력 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난, 참다운 태초의 회기역 사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사탄을 섬길 수 있다. 나를 둘러싼 각종 얕고 낮은 구름들을 보면, 누군가 이런 것들을 잘 견디는 사람을 보기도 하지만, 마침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표징들을 따와서, 다른 공간으로 함수처리를 하면, 사탄을 섬기고, 그리로써 진행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다. 너무나 비참하고, 참혹하고,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 있는 대낮에는 결코 나타날 수가 없다. 대신에 프로그램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그들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은 결국 그들이 아니라는 말이기에, 살아가는 것인 것이다. 일본을 보면, 우리가 보이고, 우리의 불쌍했던 옛날과, 지금까지의 여진을 본다. 사람이 관념을 익힌다는 것은, 대단한 무의식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관념을 조금도 익히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좀체 만날 수 없고, 내 자신부터가 경험할 수 없다. 영화가 늘 그것을 보여주고, 항상 보여주는데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언제나 두려워 떤다. 그것의 이유는 단 하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신문이 배달되면, 신라와 백제는 서로 그 시간만큼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사람들은 장수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녁에도 신문이 배달되면 어떻겠는가? 저녁에도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이 그 맨 처음의 커피 향기를 잃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싸우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죽을 것처럼 사랑을 한다. 죽을 것처럼 이란 말이, 사랑이란 말이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죽을 것처럼 해도, 사람들은 헤어진다. 그러나 그것의 반절이, 헤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편지 하나를 보내니까, 십만 대군이 멈추는 것을 보았다. 너무 편지를 남발한 것일 수 있다. 심지어는 죽기를 각오한, 에를 베라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었다. 디도서, 빌레몬서, 거기서부터는 십만대군의 흉족들이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 하나가 읽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가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문명은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는 십만대군의 흉노족. 다른 하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수하게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황성신문, 매일일보, 독립신문, 동아일보, 한겨례신문들을 생산해내는 나라. 일제는 문화국가였는가? 아니면 십만 흉족의 나라였는가? 아침에 일본 사람이 한 말과, 한국 사람이 한 말이 경주를 하는데, 저녁에 남는 것은 우리나라 경주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에게는 건물에 건물을 주고, 각종 체육회, 국제 관계, 여행 마일리지, 차이나는 클라스, 이런저런 강연 강의 같은 것을 전부 줘도, 채울 수 있는 것은 거짓말과 같은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대학원 입학이 거절되고, 등단이 차단되며, 여자 친구들이 끊기게 되었는데도, 한국 사람이 하는 말은 늘 언제나 정성 성의 성리학적 전통이 있는 것인지, 혹은 돈이 항상 부족한 것인지, 사람들에게 좃도 모르는 것들이라는 닉네임을 남발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마이니치, 산케이, 신븅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늘 새로이 태어나는 것처럼, 하루 해가 지기 전에, 갑자기,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러니까 고급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주행할 때, 백삼십킬로를 넘어서도, 그것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사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랬다는 것이다. 조상을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그래서 늘 항상 이상한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이 아침에 신문과 함께 시작해도,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여자들만 남게 되고, 하루 종일 시골 아낙들처럼 먹는 것이나 밝히고, 인라이트먼트,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문이 그 옛날의 사도 바울의 편지처럼, 전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고, 심지어는 십만 흉군들을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십만 흉군들 사이에서, 손수건 릴레이 경기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뭐라고 적혀 있다. 그것은 바쇼처럼, 하이쿠처럼, 뭐라고 적혀 있다. 손이 닳고, 진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종이를 만지지도 못하는데, 누군가 기적과 같이 뭐라고 쓴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인구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만 흉족이 있고, 사도 세자 바울의 편지만 있는 것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을 치기 위해서 길을 비켜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미쳐 있었고, 명나라 주라기 공원을 디스커버리 채널할 수 있는, 자기들의 해석학적 체험 공간을 갖게 된 것인 것이다. 조선은 그나마 외교 관계가 뜸했던 것이, 자주적이고, 뭔가 당돌한 변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일본이 지금까지 언론 자유 지수가 발전한 줄 알았는데, 지하철도 먼저 생기고, 신칸센, 각종 오토바이와 자동차, 가전제품, 로망 포르노, 그라비아, 다만 그 모든 것들이 선한 정신병처럼 근거가 없고, 막연하며, 선한 정신병처럼 다만 보기만 좋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히로시마도, 항상 그들은 부각시키지만, 그 이전이고, 이후고 간에, 비슷비슷한 것이다. 사병들을 사랑하지 않는 장군은 자연인 것인가? 아니면 정신병인 것인가? 우리는 자연스럽다 여기지 않는가? 생각과 능력, 어린이에게도 우리가 복종할 수 있다는 행동역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것인 것이다. 그리고 사병들을 사랑하는 장군이, 승전의 서류에 입회하여, 자기 이름을 쓴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인 것이다. 사병들을 거짓으로 사랑하는 장군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기는 사병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과시하는 장군들도 있지 않겠는가? 그 모든 가정들은,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수학적 증거가 될 뿐인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성경을 뒤늦게 발견하고, 기독교인들로 팽창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경험한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목사들도 이상하고 했지만, 학생들이 늘 언제나 그것의 간격에서 독서하는 것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도리어 학생들이 남는 시간에, 방학 동안에, 읽게끔 하려고, 자기는 도그마틱한 목사가 되었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은 우리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의 생애의 숫자를 기준으로, 나머지는 철학적으로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바울 서신을 얼마나 많이 읽는가? 그러면 일본은, 그리고 중국은, 처음에는 동양 철학과, 서양 문화를 경험하다가, 나중에 성경에 입회하려고 했던 것일까?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교실 수가 작은 어린 시절의 학교 풍경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었던 것처럼, 부모님이나 가족, 친척, 그리고 집이 교회 옆이어서, 먼저 기독교를 지내는 사람이 있고, 결혼까지 한 다음에, 비로소 전도가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기약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처럼, 혹은 이렇게 문화적으로 말을 하니까, 당혹스러워서 그 영원한 본질이 드러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 것이었고,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고전이 중국의 것이 아니고, 일본 사람의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은 현상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틈만 나면, 유럽에 가기 좋아하고, 사탄들이 숱한 이유들을 들기 좋아하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세포가 그와 같은 미로와 수로에 이미 적응하고 결합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들은 사탄이 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탄에 대한 신앙이 하늘을 찌른다. 짐승이 그런 면에서,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굉장히 아름답다. 익혀서 먹지 않아도 되고, 사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 자기 모습도 잊은 채, 어쩌면 읽을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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