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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홍콩과 일본, 그리고 북한은 어째서 빌링구얼리티에서 항상 실패하는가?

by 마음대로다 2019. 8. 19.

홍콩과 일본, 그리고 북한은 어째서 빌링구얼리티에서 항상 실패하는가? 






오늘 나는 영화를 보았다. 그것은 화살과 같다. 인생만 화살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생에 박복한 여자를, 그런 불쌍한 여자를 화살년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울이 그렇게 박복하였다. 박복한 것을 공통점 삼아 그는 화살년 죽은 것이다. 사울과 다윗은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그러나 세대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차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화살을 잘 쏘았다는 것은, 어쩌면 박복하였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웅은 박복하다. 미인박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나 무예가 훌륭하면, 백명을 죽이고, 마침내 고슴도치가 되었겠는가? 그러니까 완전히 성게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성계이고, 사울이 성게일 수 있는 것이다. 조총이 인간의 고대에, 역사에 나온 것은, 신정, 혹은 구정, 추석까지 포함하면, 설이 매우 다양하다. 마침내 신과 같은 능력에 도달하여서, 누군가 등을 보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날아오는 화살이나 창을 모두 제거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그만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갑신정변의 삼일처럼, 이제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신체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인데,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궁에 있다가, 낮에는 저잣거리에 있고, 반야심경에는 친구집 근처에 있다가, 다시금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근정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궁궐이나 장식 등이 단정하거나, 선비답지 않았다. 누군가 합의를 시도하고, 그것을 함께 시도하다가, 다시금 죽음의 길을 질주하였을 수 있다. 그것이 그렇게 슬프고, 안타깝고 그런 것이다. 그들은 한자 한 자를 그렇게 쓰고 죽었던 것이다. 北. 전부 북과 같았을 것이다. 보통 남송 남송 하는데, 그것은 남의 의미가, 송과 같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북송은 싫어하지 않는가? 마한 변한 진한 중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변하는 것도 싫고, 너무 진한 것도 싫다면, 마한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들의 역사는 의미가 없다. 우리들의 역사는 싸우는 자에게나 열리는 것이다. 사울에게나 열리는 것이며, 다윗에게서나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등에 있는 것을 그렇게 사람들이 슬프게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있다면, 반드시 왕권이 바뀌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이 죽었기 때문인 것이다. 청년 왕은 돌쇠를 본 적도 없다. 이름이 돌쇠였다. 생각이 단순하였지만, 우직하여 계절을 넘길 줄을 알았다. 사람들이 파리나 모기처럼, 짧은 말로 괴롭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다. 부부가 그렇게,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죽는 것을 보고는, 저녁에 친구들을 불렀고, 그들은 보름을 지나, 한 달을 갔다. 그래서 세 달 정도가 되면, 난이 진압되는 것이 아니라, 장안에 임금님들이 많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영화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다. 오직 엑시트 같은 것에서나 잠깐 드러나는 것이다. 혼자 보았다면, 떠들고, 웃으면서, 마음껏 울기도 했을 것이다. 보통 인간의 언어는 생어와 사어가 있는데, 생어는 전화기로, 혹은 면전에서 직접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것이고, 사어는 녹화된 것, 녹음된 것, 기억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 만든 말이기는 하나, 그렇게 영화에는 사어가 많은 것이었다. 죽고 몹쓸 말이 아니라, 죽고 몹쓸 세상을 보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의 죽음에 통신의 지연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예의가 풍부하고, 남자를 많이 사귄 여자일수록, 아이에게 훌륭한 남자가 따로 있음을 알 것이고, 여러 번 죽은 사람일수록, 죽음으로 낭비되지 않는, 때로는 수직으로만 산처럼 영화로운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면서, 생각하다 보면, 홍콩과 일본이 그렇게 우리들의 이와 같은 빌링구얼리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슬픈 것이다. 사람이 화만 내다보면, 결국 사냥을 당하게 된다. 부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지와 실존에 있어서, 화만 낼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고, 말을 할 줄 알면, 반대로 강동육주까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이 이와 같은 절박한 순간을 모를 리 없고, 도리어 우리들보다 잘 아는 것들일 것이다. 사탄은 그렇게, 사람들을 화만 내게 만들기를 잘하고, 훌륭한 빌링구얼리티를 도리어 무시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에게는 발언권을 무조건 부여하는 것일 것이다. 천사는 아니더라도, 태공조는 없는 것인가? 주자에게는 그렇게 아무런 기회도 없고, 없는 것인가?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와 같은 부부는, 겨우 한자 北만 쓰고, 잘 보이지 않는 이틀 째 반야심경에 이르러 죽고 말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그 모습만 기억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습만 기억하여서, 심포지움이라는 대화록을 쓴 것이다. 그 대화록이 아무리 풍성하기로서니, 그것은 플라톤의 것이었고, 그 한자 한 자는 다만 하나의 부부에게서만 나온 것도 아니었다. 열 명의 부부, 백 명의 부부가 반복되어서야, 겨우, 연개소문이 플라톤에게 전해진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서양은 그것이 천 번 반복되어도, 문화가 세상을 이겨내는 글이 나오지 못하고, 동양은 한 번 두 번 나타났는데도, 심포지움이라는 걸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아들과 딸들이, 서로를 뒤늦게 만날 때, 그와 같은 쪼개진 옥패를 맞춰보고는, 세 살 때, 네 살 때, 헤어진 사람인 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한자는 숱한 빌링구얼리티로 되어 있다. 일본은 어떠한가? 그것은 결국, 口本이 아닌가? 정말이지 이 영화가 주옥같고, 아름답고, 살아있고, 너무나 슬픈 것이다. 남자가 백수인 것은, 일을 잘해서, 마치 일이 없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다. 그와 같은 의미인데, 지금 세상에 어떤 남자가 그러한가?









인터넷으로 다시 보는 이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그렇게 슬플 수 없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일본이 구본이 되고,


홍콩이, 읽어도 남는 것이 없는

홍콩 인터내셔널 포스트 기사에 밤낮 없이 휘둘리는 것이......



*



사탄이 영어를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미국이 독일어를 썼다면, 당연히 사탄은 독일어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한국어를 쓴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탄이 그렇다면, 빌링구얼리티를 그 정도는 해야되는 것인데


우리를 보자. 오십 가까이 영어를 해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사탄에게도 아이들이 있고

항우 원인을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그래서 늘 있는 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