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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지옥이 과연 있는지

by 마음대로다 2019. 7. 11.

지옥이 과연 있는지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누구는 그것이 빠르고, 누구는 그것이 느린 채로,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빠르다고 해서, 계속 빠른 것이 아니고, 느리다고 해서, 마냥 느린 것도 아닌 것이다. 관념은 느린 것이다. 감각이 빠른 것이고,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이성계는 그렇지 않다. 이성계는 이름이 감각적이다. 그런데 이름이 이성적이다. 우리가 그것이 모여 있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물론 우리 자신에게는 늘 언제나, 생각은 생각대로, 감각은 감각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음악은 감각이다. 문장이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음악일지라도, 감각인 것이고, 아무리 생각 많은 문장일지라도, 그것이 다 생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늘이 풍년이고, 가격이 폭락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마늘은 귀한 식재료인가? 마늘은 생각이 감각과 만난다는 것의 증거와 같다. 음식을 할 때도, 마늘을 어떻게 함께 볶을 때가 그렇게 감동적이고 그렇다. 이성계는 그 자체가, 지금의 근정전의 풍경처럼, 비어 있는 모습만 같다. 누구도 이성계와 같을 수 있고, 두 사람만 있어도 가격은 폭락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같은 사람이 열 사람만 있어도, 서울은 아주 풍족한 도시가 되는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고, 사관이 기록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그렇게 내 자신을 비추어서 신빙성이 떨어지고, 생각의 바른 안내자가 없는 것이 힘들고 하는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었다. 우리는 명청교체기라는 말은 하지만, 고조교체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명이 인상과 어감이 낫고, 청이 겨우 비슷한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고려가 항상 불온하고, 조선이 그에 비하면 엄청 나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투수 교체가 된 것이 아니라, 조선으로 성립된 것인 것이다. 어떠한 동양학자나, 음양학자 같은 경우에는, 그것을 남녀간의 사이, 혹은 남녀간의 진행으로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모르고,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인물들은 개성이 없고, 고려사 같은 경우에는, 늘 언제나 동양고전적인 위인전으로 진행하려는 느낌이 있다. 그것을 못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못났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래된 답안지 같고, 현실은 복잡하고 어려워도, 다만 답안지에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사무라이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왕조실록은 문체가 확 바뀐다. 처음의 어떻게 진행되는 소리와 분위기, 느낌은, 삼국사기를 연상케 한다. 결국은 그와 같은 강기가 사라지니까, 조선의 역사가 사라진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고려가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고, 늘 언제나 고려하면서, 조선으로서 진행을 하니까, 어떻게 보면 세상은 오직 하나의 완벽한 균형에 의해서 지탱되어 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모델은 순간 완벽한 것이고, 하우스는 균형과 무게, 튼튼함과 방열방한을 기본으로 한다. 사람들의 모델이 되고, 사람들의 하우스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국제관계 속에서,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오래된 공동체적인 생각 끝에 조선이 나온 것이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커피 한 잔은 얼마든지 누군가를 사줄 수 있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이런저런 잔인한 장면이 신경에 거슬린다. 반드시, 어쩌면 필수요소인데, 무슨,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기억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하는 것 같고, 사람들은 황태자가 숲 속 사냥길에, 기가 막힌 도서관을 발견한 것 같은 장면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궁예가 전쟁 중에 아내를 잔인하게 학대한 것으로 그치거나 할 것이다. 먼저의 것도 의식이고, 습관이며, 나중의 것도 의식이고, 육체의 감각인 것이다. 거거서부터 삼국사기가 피라미드처럼, 균형을 잃었는지, 아니면 도리어 적극적인 균형을 획득하였는지 우리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시간과 풍요, 서스펜스가 있다고 한다면, 고려사보다는 조선왕조실록이 재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와 닿아 있는 부분이다. 


지옥은 생명체와 같고, 늘 언제나 돌아다니려고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옥이 있는지 항상 궁금하고, 늘 우리의 스핑크스에 불과한 것으로, 결국에는, 그런 것으로 반성하곤 한다. 고려사는 거란이 지옥 같고, 조선실록은 일본이 지옥 같다. 다만 조총을 하나 얻었다고, 마치 지옥에서 무기를 하나 얻었다고, 선발대처럼 조선을 쳐들어왔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지옥에 관한 신비이고, 학문이 되는 셈인 것이다. 한국전쟁과 비엔남워는 그와 같은 지옥에 관한 필연성의 결과일 수 있다. 결국은 핵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쳤던 것이다. 핵무기를 너무 일찍 터뜨렸던 것일 것이다. 한국전쟁도, 비엔남워도, 핵무기를 각오한 전쟁일 수 있다. 핵무기를 맞고 나면,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린다. 핵무기 이후의 일본은, 핵무기 이전의 일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옥이 자신을 표시한 것으로 밖에, 그와 같은 애타는 마음을 읽어줄 만한 것이 없다. 우리가 멍청하고, 국사라고 한다면, 늘 언제나 제한된 인피니티 속으로 빠져들어가, 절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륙과 기후가 회전하는 거대한 틀은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우리들의 걱정과, 생각, 그리고 경제적인 대비가 과연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으로 환원이 되는데, 그것이 서브스탄스, 그러니까 반드시 실체인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명나라일 때는, 중국이, 생명체처럼 활동하는 지옥에서 친구하자고 하였다. 유혹을 다녀온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렸다. 그것을 공부의 원동력을 삼을 것이다 하는데, 늘 언제나 별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지옥 같은 공부의 방법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우주인 복식의 청나라에서 친구하자는 지옥에 다녀왔었다. 그들도 집에 들어가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도 혹시 아편을 하는 것인가 했는데,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태양을 피하고, 거의 모든 생명체와 섹스를 하고, 집에 땅굴을 파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조가 고려였다. 고려는 말 그대로, 하이 워먼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친구하자는, 삼국사기라는 정신질환 느낌이 가득한 하이 워먼의 경전을 보고서는, 그리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예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테도, 혼자만의 천재적인 예언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지옥의 실체에 관한 논쟁이 종식되었다. 고려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지옥 사람들의 교육학에 가장 모델 같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와 같은 시간과 인격이 남자다움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삼국사기도 겉이 타버린 서적 같은 불균형이 아니라, 쿠푸 왕의 피라미드 같은 균형이라는 것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뒤늦게, 지옥으로부터 친구하자는 유학을 다녀왔다. 원래 약간은 체질이, 지옥의 몇 개의 문은 그냥 패스해도 될 정도의 인격들이고, 사회이며, 어두운 단면들이었으나,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이유들이 하나가 되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항상 드는 생각이, 중국이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점령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나라가 외국과의 전쟁의 신화를 갖는다면, 일본이 적당하지 않는가 싶은 것이다. 이성계는 그와 같은 세상 모든 불균형들을 보았던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