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를 이해하는 이상한 길
일본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 미루야마 마사오, 유키 구라모토. 우리나라에도 제법 유명한 학자들이 있다. 김경재. 전철. 신현균. 뭐 유길준, 박영효, 이영애 등은 제쳐놓기로 하자. 학자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은 순천 드라마 세트장에서처럼, 마음이 들뜨고, 저녁 해에 아무런 먹을 것이 없이 죽을 것 같을 때, 인도의 시크교의 회당에 가면, 무료로 잘 수도 있고, 먹을 것도 먹을 수 있다는데, 그런 생각이 빛의 속도로, 인도로 가는 길, 그리로 상대성 이론처럼 질주를 할 때, 이것은 아니다면서, 그것도 괜찮지만, 다른 모든 막장 호러 무비에 비하면, 그런 비탄의 마음가짐 속에서, 그것보다 나은 것이 내 주위에는 있을 것이다면서 돌아보는 눈길, 마음, 티셔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 같은 것이 있을 것인데, 학자는 모름지기 그와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믿음 같은 것인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로 되어 있고, 로, 그러니까 학이 자기의 몸을 가만히 두는 데도, 이미 새 을처럼 되어 있는 것이고, 고, 그러니까, 고니, 영화 주인공 이름, 머리를 길게 내민 것이 되는 것이며, 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그와 같은 로고스가 있다. 어째서 그와 같은 우연한 그림자가 로고스까지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이념인가? 그러니까 당위적 해석인 것인가? 자연적인 울림인 것인가? 내가 미시마 유키오를 읽고 좋아했다가, 중간에 바쁜 서울 생활 속에서, 읽기를 그만 두었던 것은, 너무 사카린이 첨가된 청량 음료를 한정 없이 먹고 있구나 각성을 하자, 나의 뜬 눈에 다소 놀란 눈초리로 사라졌던 어떤 친구, 근접한 인격, 그런데도 가벼이 인사를 하고는 불투명도가 제로가 되어갔던 적이 있었다. 미시마는 그와 같은 서양 서적성이 동양에 제로라는 사실에 대한 혁명 같은 것이었다. 이름이 약속하고 있었고, 이름이 관광청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금각사를 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양에는 있는 자유가, 전통과 단절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기복신앙이, 신아영,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소설가의 자유와 지배, 통찰의 자유와 그럴 듯함이라는 것은, 프랑스의 칸 영화제와 같았던 것이다. 어째서 서양에만 고전이 존재하는가? 어째서 서양에만 고전과 근대적 소설이, 소설가의 비상한 두뇌 안에서, 퓨전 오브 호라이즌을 이루는가? 그것은 현대적 고전과 독자의 존재를 퓨전하게끔 하지 않는가? 미시마 유키오는, 일종의 내가 안 본 영화, 기생충처럼, 봉준호, 봉준호 마드모아젤, 그런 가능한 모든 젤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다. 영화는 영향이 크고, 소설은 말 그대로 미미하다. 사람들은 기계적이고, 장치적이며, 현실 권력적인 풍경을 좋아하지, 가난한 작가의 속삭임 속삭임, 최윤,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봉준호는 아마도 소설의 진리를 알아보았던 것 같고, 영화를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소설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던 사람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간인, 경계인은, 스스로의 스타일로 인해서 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세익스피어 원작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니까 세익스피어의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대본이 작품이라는 한자어처럼, 이미 독립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독립해 있고, 석가탑은 독립해 있지 않는가? 다보탑은 독립해 있고, 아스달 전기는 독립해 있지 않은가? CCTV 본관 건물은 독립해 있지 않은가? 그것은 기단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여서, 기단만 놔두면 독립할 수가 없으나, 경주의 남산처럼, 모든 작품이 끝난 다음에, 독립성의 여부를 묻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겨우 기단이 몸체보다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기준이면, 얼마나 피라미드는 독립적인지. 사람들은 망상에 빠지고, 독일 관념론이 아니라, 이탈리아 관념론에 빠지며, 지중해가 하늘이다 여기게 되고, 성경 속의 돼지들처럼, 하늘에 빠지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다리가 마음 편히 달릴 수 있고, 그와 같은 사람을 환영하는 공간을 만나지 못해서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전쟁을 선동하고, 이웃 나라를 선동하고 했던 것도, 그의 일렉트리시티, 그러니까 전기적 기단성을 반성하고자 하면, 참으로 마부와 같은 가정 환경에서, 신영균과 같은 대법관이 나온 케이스라고 할 만한 것인 것이다. 대법관은 인격인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을 선동하고, 이웃 나라를 선동했다는 것은 일종의 소프트웨어이고, 그의 근대적 자유적 존재와 몇 편 안 되는 증거들은, 소중한 뱅크, 그러니까 은행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은 영향력이 없는데, 내내, 평생, 저주하고, 욕하고, 전쟁을 선동하고 하는 것에는 원흉을 돌리는 것은, 계산의 시도는 마땅하나, 스스로는 형태가 늘 항상 신비스러운 심해 어류와 비슷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두고, 이광수가 극찬을 한 것은, 그의 죽음과 비석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창 이광수 일제 식민지 시대에 벌써, 그는 바이오그라피가 아니라, 일렉트리시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이오그라피는 인정할 수 있으나, 일렉트리시티는 인정하려는 경향이 없다.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지배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일렉트리시티가 뭔지, 설명이 없어도, 직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와 같은 사실을, 여간해서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세계관과 철학에서는 제외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가 전쟁을 선동하였기 때문에, 겨우 바이오그라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전쟁을 선동치 않고, 인륜과 사랑, 파격적인 동양 비판과, 서양 문명에 대한 통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캔디처럼, 앤쏘니, 그와 같은 복숭아의 씸퍼씨가 강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에서 밀려나고, 아무리 영화를 찍어주어도, 성경이 구약과 신약 모두가 이스라엘, 그리고 지중해 국가에서 밀려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피라미드의 기단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없이, 국제 아이엠에프가 없이, 지금까지도 환락 속에 있고, 환상 속의 그대, 서태지의 좌우지장지지지 노래에 영혼이 들썩이지 못한다면, 난 알아요, 교실 이데아, 그대는 정말이지 아직까지도 쾌락주의나 실용주의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대 쾌락주의와 근대 실용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 둘을, 단지 한국어 발음만으로 표현하면, 철천지 웬수처럼 비행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발견할 수 있는 레이다, 혹은 인터넷 웹 생활 내지는, 그와 같은 망이 없는 것인가? 내 친구가 독일어로 망헬을 알려주었었다. 내가 한국어 어떤 것을, 독일어로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내가 물은 한국어는 생각나지 않는데, 망헬 대답한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는 민중으로 살면서, 책 안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고 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영원히 기단 바깥의,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책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어떻게 성욕까지 채울 수 있는 기가 막힌 삶을 살지 못한다. 성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게 노예가 없을 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합법적인 방식이다. 사랑이다. 그러니까 군사력을 확충하고, 그것을 늘 항상 시위하고, 그러나 주변 국가에는 발달한 사랑, 그것의 은밀한 것에서부터, 홀트 아동복지한 것까지 내보낸다면, 평화주의자인 것이고, 문화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와 같은 오즈의 마법사 길이 있다고 해도, 끝까지 간 나라가 없으니, 간다라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묵경, 성애적 나라의 국가를 성립하려고 하는데, 계속되는 성장, 영원한 혁명, 항상 세가지의 방향에서 태클이 들어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본질주의인 것이다. 나는 본질주의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꼭 젓가락질 본질주의만 밥 잘 먹는 것인가? 그런 에세이, 본질주의를 몰라도, 밥 잘 먹는다고 하면, 나는 도리어 환영하는 편이다. 싹 수는 없으나, 그와 같은 모내기의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듬성듬성해도, 대머리와는 달라서, 나중에는 아주 논어가 빼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의 태클은 사탄에게서이다. 사탄은 사탄으로의 영원한 속성이 있다. 대화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오고, 우리의 세포가 알아서 변화한다. 그 둘이 만나는 것은, 속성이 처음에 비슷한 것이고, 나중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의 태클은, 기단 바깥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전쟁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민중이란, 그리고 그것의 개념은, 아시아 한정적일 때는, 그리고 세계 문명의 오랜 시간 속에서는, 결국, 정신의 기단 바깥성을 뜻하는 것이다. 교육의 단 하나의 길이 열릴 때에, 민중은 늘 언제나,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한다. 그러나 사탄은 아니다. 가. 인. 그러니까 인간인 것이다. 사탄이었다면, 가. 탄. 혹은 바. 키. 혹은 시. 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음향과 조명, 알파 베타 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민중으로 있을 때는, 저절로 그렇게 사탄의 기생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모든 말들을 하고 나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니었대도, 제국주의가 된 다음에는 자기 힘으로 도무지 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비. 석.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없어도, 한신대학교는 김경재와 훌륭한 전철 등으로 해서, 먼저의 박봉랑, 안병무, 조직 신학의 전통이 흘러가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이처럼 흔들리는 사탄의 기생충을 한 번 본 다음에는,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 영원한 성경을 들은 다음에는, 이전의 성경이 있대도, 그들을 모두 멀리하고, 새 하늘 새 땅에서, 우리나라 영화 신세계, 도무지 그렇게 교권적으로만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동하는가? 어린아이의 고고지성은 흔들리는 사탄의 기생충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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