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예술이 되어버린 슬픈 인생.....
왜 서양에는 훌륭한 비평가가 없는가?
비평은 하다 보면 느는 것이어서, 어쩌다 보니,
탄압을 받고 있고, 그래서 있던 비평들도
다 들어가 버린 것일까? 우리는 내가
정확하게 방종하다 보니, 원래에도 재능이 있고,
평균을 맞추다 보니, 나처럼 이상한 비평은 못하더라도
작품이나 다른 다큐, 프로그램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수준이 향상된 것일까?
아니면 자연적으로 이리된 것일까?
우리는 지금 엎질러진 물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화를 보고 싶어서인 것이다.
그것의 예술적 의지를, 공간에 대한 향유를,
윤상의 노래 가사에서처럼, 메아리가 되어
널리 퍼지는 것을 좋아해서일 것이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극장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닮아서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 미인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닮아서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리스 여인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백제가,
백이와 숙제처럼, 산골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고
살아서가 아니라, 신라와 고구려와 싸우기만 하지 않고,
그들의 도를 전함에 있어서, 행정기관과,
그들의 고통과, 사시사철, 그들의 두려움과,
그들의 절정을 향한 교육에 일가견이 있어서인 것이다.
그러니까, 산토리니, 백제가, 그리스의 미인들과
닮아서인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자기들을 일본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항저우 사람들도, 그러니까 페이킹,
북경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이 조선을 침략하니,
조선을 지켜주기보다는, 재산관리라고 하는
명분을 달고서라도, 같은 일본 사람들처럼
침략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홍콩 사람들도,
그리고 헝가리 사람들, 그리고 벌린 사람들도,
어째서 한국 사람들과 동일시 되지 못하고,
어째서 그리스 연극의 공간에 주인공으로서,
주된 관람객으로, 나처럼 최고의 평론가로서
입장하지 못하고, 다만 늘 항상 일본 사람들과
동일시 되는 것일까? 주관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주자라는 것은, 영어로 어떻게
표현이 되는가? 서브젝티비티이다. 내가
주자라는 말을 생각하고, 영어로 떠올리려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서브젝티비티이다.
영어는 우리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미줄이 있다. 그와 같은 란제리가 있다.
그러나 직지심경, 그와 같은 활인탄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탄환도 있는 것이다.
총에 맞았더니 죽고, 총에 맞았더니 다시 사는.
그와 같은 탄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자는
다만 주관에 걸치지 않고, 그레이트라는 말을 갖는다.
그러니까 더 그레이트 서브젝티비티인 것이다.
그것이 주자이다. 어떻게 유럽은
삼국사기의 발아래에 있게 되었는가?
도대체 나의 나이에 걸쳐, 본격적인 이십 대를 지나,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그것의 연극적 공간을
우리에게 넘겨주고 말았는가? 평론가가 없어서인가?
어떻게 보면, 나는 창작자이고, 야한 포토샵이고,
지금은 오토바이가 없는 화랑이자,
일반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기독교 목회자이기도 하고,
신학자는 옛날부터라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얍삽한, 한결같은, 비평가였던 것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창작의 물길을
자기에게 돌리는 자가 아닌가? 어떻게 보면,
잔인한 사람인 것이다. 작품을 보고,
우리는 물에 젖으나, 그것의 고양이 목욕을 시켜주고,
다시금 헤어 드라이기로 말려주면,
사람들은 당연히 먼저의 작품에 물에
젖었다는 사실을 잊고, 후자의 경험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작품은
그것의 한국어적인 어감 때문에,
독립을 뜻했었다. 그러나 드라마 이몽의 경우처럼,
작품이 작품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독립이 아니라,
유사 독립, 그러니까 거짓 독립일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깨닫게 된 것이다. 창작 경제가 아닌,
비평가가 작품 아들 며느리를 정신 나가게 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는 사실 경험한 적이 없다.
우리는 고통을 당했고, 가끔 막걸리를 마셨으며,
그것이 그렇게 우리들의 시와 같았었다.
겨우 이층짜리 목조 가옥이 있을 때는,
우리의 시가 그렇게 그것의 평수와 맞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범우주적인 건물들 사이에서는,
시는 마치, 유리관 안에 갇힌 정물화처럼 된 것이다.
나비 축제는 여기저기에 있고. 그러나 비평가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처럼 읽지 않고, 쓸 수 있는 경지에 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디덕션이 아니라, 인덕션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보지 않고,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 하는 경우에는, 비평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작품이 없으면 살 수 없었다.
우리들의 가난은 대를 이어갔고, 아이들이
각종 문학과에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태교와 같았고, 대종교와도 같았다.
그래서 비평가라고 하면, 그와 같은 도저한 흐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의 운명,
그것의 조타수와도 같았던 것이다.
철학이나 사회학이 발달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어째서 위대한, 우리들도 알 수 있는 감독 같은,
평론가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비평적 기원이 실은
사탄과 나란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독백이기도 하고,
방백이기도 하며, 대화이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플라톤의 글을 사탄의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항상 그것의 본질과 실상에서는 어긋났던 것이다.
그것인 것이다. 작품은 죽음인 것이고,
하이데거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죽음으로의 존재이다. 철학은 비평이 아니니까,
죽음의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비평은 우리의 평강 공주처럼, 사신의 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온달의 삶이 죽음으로
완벽하게 되어,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하자,
그것을 덮어주는 평론과 생각을, 추념과 제의를 행하자,
온달의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런 것을 잘해내겠는가? 비평을 경제로 생각하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비평을 아지랑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어찌 우리가 읽을 수 있겠는가?
비평을 평강 공주라고 생각하거나, 함평, 혹은 평창,
혹은 평양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다만 진정제를 먹고자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제를 많이 먹고, 특히 남자들이 비겁하여,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이, 소녀들마저 많이 먹게 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나마 있던 교육이나,
예술이 모두 동이 나지 않겠는가?
사탄은 갈수록 뻔뻔해지고, 사람들은 늘 무심한 도에
익숙해지고, 사람들의 눈은 가자미마냥
한쪽으로만 쏠리게 될 것이다. 지금의 유럽 사람들을 보면,
잘 생긴 가자미처럼 보인다. 우리는 처음에는
목각 인형 같고, 다만 절에 다녀오는 것 같고,
제암리에서 죽은 삼국의 크리스챤들 같았으나,
그나마 서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정확히 어느 선부터,
한국 영화가 보다 입체적이 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안예은의 홍연이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다 보면, 그것이 우리 옛날
에스에프 공포 영화 M의 주제가와 연속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만 아름다운 노래만을
들을 수 있고, 나처럼 그 둘을 연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심은하처럼 젊었고, 김지수와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불가능해졌지만,
이처럼 노래와 아름다운 영혼은 엄연하고
한시간 반복 같은 패턴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모두 만날 수 없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들이 실은 많지 않고, 평론가가 되면,
셀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중부에 있는 고속 국도를
달릴 때였다.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대학에 들러서,
그곳 학생회관 로비에서 커피를 마셨던 것도,
너무 속도를 내어서 오토바이가 터질 것 같았고,
그런 경험을 평생 해본 적이 없어서인 것이다.
거기서 내가 활인탄을, 수천발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쏴서,
죽이고자 했다면, 얼마 없던 사람들 모두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 전체가, 그것이 그다지 크지 않을 때에는,
국가가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생명과 같아서,
다만 비평가가 있어야 지속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비평이라는 활인탄을 쏴서, 존재를 맞춰야지만,
우리가 사는 빌딩의 높이에 그나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콩도 있지만 오이도 있는 것이다.
온 몸이 오이 같을 수 있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글씨가
오이 같을 수 있고, 생각과 그것의 연속이
오이 같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대놓고, 오이도가 있지 못하다.
오이가 있고, 오이 비누가 있고, 서울의 숨은 이층집들처럼,
아름다운 군자와 군녀가, 숲이 내다보이는 욕실에서
목욕을 해야지만, 문명은 자기를 거울처럼 보며,
드디어 겨우 아름답기만 한 거울 단계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조선명탐정 이번 작품처럼,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른 채로, 그냥
김대중 수준의 것을 보았다고 해서,
사랑이 퇴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은
좋은 작품이 있다면, 나쁜 작품은
지옥에 다녀오는 훈련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좋은 작품이 있다면, 나의 비평과 헤어졌다는 가정에서도,
고작해야 이 정도가 나쁜 작품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옛날에 얼마나 선진국들을 향해,
오이 비누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최루탄으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다음에도, 그래서
서울이 옛날부터, 키 큰, 미인이 많았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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