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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리는 항상

by 마음대로다 2019. 3. 21.

우리는 항상 










우리는 지금 대격변 시대를 살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만 해도 그렇다. 그것의 충격은 결코 한창때의 홍콩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북한 대학교의 한국 대학교와의 휴전이라고 하는, 기상천외한 토대 위에서 자라난, 정말이지 야트막한 언덕이요 풀들이었다면, 매우 심각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심각한 완성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실질로써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한국 문화와 정신이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별로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 안 한다 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고, 그러는 중에 서구의 공산국가가 하나씩 둘씩 사라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있는 곳은, 중국과 북한 뿐이다. 나는 뭐, 그런 것들이 지금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대하고, 어느 지역의 공장에서 재생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붕 떠 있고, 우리는 지금 오직 겐츄리 크레인과, 와이티, 그리고 검수원, 언더, 라씽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티씨. 센터. 기타 등등. 나는 단 하나도 물러나지 않는 관념들과 육체들을 사용해 왔지만, 사람들의 스스로의 체력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두 가지로써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나. 그리고 고등학교까지의 나. 그리고 한신대학교에서부터의 나. 무선통신이 활개치던 시기부터의 나. 귀신은 물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귀신이 서구 공산권에서 얼굴을 자주 내밀다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테러로써, 내가 공부하고, 나이를 먹고 난 다음에는, 내게 씌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매우 안정적인 사탄의 제국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보면, 그들 국가의 몰락과 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무슨 인간도 아니고, 몇 명의 사람들도 아니고, 국가가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인가?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찰스 다윈. 우리나라를 보면, 인구수가 이처럼 늘어나자, 우리들 도시가 커졌고, 서울은 엄청나게 팽창했고, 한산하던 국도와 고속도로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서양을 보면, 이상한 것이다. 항상 하수구가 있는 것 같고, 언더월드가 있는 것 같고, 그렇게 싸우다가 대충 환기구에 들어가고, 하수구에 떨어져서, 갈등한다고 하나 넓게 보면 인구수 조절에 이바지하는 것만 같은 것이다. 서양이 테러로써 사탄이 얼굴을 보이고, 공산국가들이 역할을 담당할 때는, 우리는 한국에서 외국 사람이 영어를 쓰기만 해도,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했었는 것이다. 지게 놓고 에이 자도 모른다고 했다가, 북한군이 도끼만행 사건을 벌이자, 그것은 토마호크, 무슨 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와 같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북한 대학교 학생들의 의식을, 날카롭게 정리하고, 보고하고, 꿈꾸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가리켜 실재라고 했다. 그러니까 북한 대학교 학생들이, 김일성 대학이든, 김책 공대이든, 현빈과 같은 사람이 없을 지언정,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실재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이상한 이데아를 가리킨 것이기도 하다. 이데아는 형상인가? 이데아는 형식인가? 조금은 형식적 형상의 자기의식적 운동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니까 형식에도, 형상에도, 그리고 그와 같은 평면적인 측면에서도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재라고 언명하는 나의 의식으로 언제나 소급되는 것이 있을 것인데, 이데아를 말하고 난 다음,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애프터 이데아가 이데아가 되는 셈인 것이다. 서양의 철학이, 플라톤 철학이 답보상태가 된 이유는, 힐쉬베르거가 정교하게 플라톤의 말을 받아적고, 가장 교과서적으로 정리하려하면 할수록, 그것은 이데아가 될 뿐, 애프터 이데아가 되지 않는 것인 것이다. 플라톤을 말한 것일 뿐, 플라톤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가장 철학사를 갖고, 그와 같은 주제를 갖고, 말하는 사람의 위상을 되살려주는 통로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칸트의 물자체에 또 하나의 아이템으로써 포함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걸쳐, 힐쉬베르거의 수준에 멈춰 있었다면, 그것에 못하거나, 혹은 더하거나 하는 차원에 있었다고 한다면, 서구 공산권의 사탄적인 악역은, 그 공고한 세력은,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말들이, 씨앗이, 차바퀴가 요란한 거리에 떨어져 있었어도, 인도의 국기가 세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우리 세상 없는 인도 사람들까지도 한두 시간을 명상과 흥미, 관심과 기대, 그와 같은 드라마의 길을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영국은 인도에서 물러났고, 어째서 한류는 인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어째서 궁극적으로 한국은 일본과 하나이고, 중국은 인도와 하나인가? 그와 같은 목적과 방법이, 도대체 어떠한 이야기들을 앞으로, 어떠한 철학적 관념과 문학적 비젼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인가? 드라마 바벨이 장신영의 아름다움만 남기고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영화가 잘 되었다면, 장희진까지, 더 나아가 다른 여배우까지 드러났을 것이나,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죽고 없고, 장신영만 남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이미지는 폭거와 비슷한 것이다. 왕이 된 남자에서는, 작가가 떨리는 마음으로 바둑돌을 옮기고,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의 작법인지, 아니면 사회주의에도 소설이 있는 것인지, 그와 같은, 혹은 브레히트 같은, 약간 표현주의 계보의 것인지,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선 다음에는 문학이 사라지지만, 그것이 성립하기 전이나, 과정 중에 있을 때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지지 발언과 입장을 표현했었는데, 그것의 가부를 묻고, 그것의 진정성을 따지는, 조금은 살얼음과 같은 리얼러티 위에서 우리도 조금은 빠져 있을 때가 있었드랬다. 그 희미한 기억과, 서랍 속의 기계를 꺼내어 바라보면, 그만큼으로도, 작법 노출 기법이라고 하는, 누군가 말을 했을 것인데,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고, 아방가르드, 그러니까 누구의 가방도 아닌, 그 예술적인 의지가 내비쳤었던 것이다. 그것은 반갑고, 동시에 우리의 입맛이 도대체 무엇을 먹어왔길래, 드라마의 마지막이 이처럼 담담한 것일까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알함브라가 나은 점이 있는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 세 명의 존재를 버그로써 만드는 장면에서는, 어쩌면 숙청의, 그와 같은 공산 용어, 참다운 용어를 보는 것 같았다. 숙청이란 비본재를 비본재라고 언급하는, 철학적 차원에서나 진실로 이뤄지는 것이다. 버스에 타려는 사람을, 옛날에는 안내양들이 존재라고 여겨서, 자기는 가장 바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기도 했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세계의 역사는 참답게, 주자를 향한 기회주의적이거나, 사탄적 현상으로써만, 다만 귀신 놀이의 숨가쁜 전치로써만 진행하는 것이 아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주자의 힘으로써도, 세계는 변하고 있다. 드라마가 있건 없건 간에, 나의 친구가 있던지 없던지 간에, 친구가 철학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서양은 사탄의 시스템이 되고 있으나, 헤겔은 중간인지, 나치는 다시금 그것의 시스템을 사탄의 것으로 선언하는 것인지, 몇 가지 활자에도 사람들이 활어가 되는 세상에서, 나의 이런 문장들만 해도, 세계는 다음을 이어가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학은 몇몇 강력한 천왕봉과 대청봉으로써 먼저의 길을 가고 있었고, 그들이 사라지고, 나도 또한 사라져도, 남은 자들이 이어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한류가 이처럼 오랫동안, 그러니까 자기들 국가에 외국의 영향이라고 지속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들은 제 삼세계였을 것이고, 설명이 빈약한 것이긴 하다. 아직 문화적 위력이라는 것을 실감한 적이 없는 것이고, 일반 국민은 작품을 흠모하지만, 작가는 다른 이의 작품이 두렵기만 한데, 그와 같은 경험이 한국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나 영국 식민지였던 것이, 다만 총칼을 들고 자기들 있는 곳까지 쳐들어왔으니 벌어진 현상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또한 맞는 것은, 이처럼 오랫동안, 서양, 그러니까 유럽과 미국이 아무런 문화적 영향력이 없던 때도 없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을 하고자 한 것일 것이다. 서양의 팝송이 기가 막혔을 때는, 팝송이 카세트 라디오 속에서 점프하라고 하면, 세계 시민 모두는, 그 동안의 역사는 모두 잊고, 점프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뭘 하라는 말도 없고, 좋은 노래도 별로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여배우가 문제이다. 여배우는 독특한 무한수를 갖고 있다. 여배우 장신영은 스스로도 숨을 쉴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바벨의 다른 여자들은, 약간 존재와 지속이 위태롭지만, 장신영은 드라마 바벨이 있건 없건, 그곳 페르세폴리스를 오르고 내리고 할 것 같은 것이다. 한국 여자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예뻐 보이기는, 자기들 국가에,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발리, 탄자니아, 처음 있는 일이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운 황인종들은, 자세히 보면 흑인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드라비다족으로도 보인다. 다만 그와 같은 스킨 효과가, 아무렇지도 않게 얼마나 많은 영향과 위로를 주는지 모른다. 처음 그것을 실감한 사람들이 대만이고, 중국이고, 보편적인 인민으로서의 일본이었다. 서양이 뭘 잘 한다면, 적당히 웃던 사람들이, 우리가 뭘 잘 한다 하면, 막 울고, 웃고, 좋아하고, 칸페키데쓰네, 혼또니 스고이데쓰네 했던 것이다. 오직 이유는 하나, 동양인은 체격이 크지 않고, 자기들처럼 스즈키류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뭘 잘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돈을 수억 벌면, 수억원으로 뭘 먹겠다는 것인가? 생각이 깊어지면, 바벨과 같은 명품 연극 같은 것을 꿈꿀 것이다. 옷을 입고, 앰프를 구입하고, 풍경이 좋은 침대를 마련하면, 반드시 인물이 되고자 할 것이다. 약간은 장신영이 한국을 대변하는 것 같은 독재는 있다. 장희진은 일본 여자 같은 구석이 있다. 우리는 여행하면 끝이 난다. 세상의 모든 문학은, 철학은, 단단하기로 소문이 난 신학마저도, 그러하다. 앙코르 와트를 대충 볼만 한 것이 아닌 것은, 또 오라고 해서 또 왔다는, 그럴 수는 없고, 그것은 반드시 두 번의 삶이기 때문이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칠십팔년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정말이지 금지된 장난 같은 소꿉놀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와 같은 노래로는, 우리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결코 두 번을 가지 못할 것만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