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이제 댓글들에 가까운가?
우리가 아무런 도화선이 없을 때는, 좋건 싫건 간에 가장 나의 에너지를 많이 가져가는 것이 사탄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기가 어째서 아기이고, 악동이 어째서 악동이겠는가? 가정을 이루고 살면, 가장 많이 나의 에너지를 가져가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주자를 싫어할 것 같지만, 또한 원거리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주자를 편들고, 마음으로 하고, 나와 함께 사탄을 감별하는 조종석에 오르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강원도 양구에서, 대암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저녁 해를 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구석구석, 그렇게 아름다운 귀향, 그렇게 아름다운 시각화, 자기화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비애 비슷한 것이다. 비창 비슷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가리켜 불교적으로 말하면, 송창식이라고 할 만 하다. 사람이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사탄을 만나게 되어 있다. 마주치게 되어 있다. 사탄에 굴복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현상학적이라고 부르던지, 에드문트 훗설이 오히려 이차대전의 주범이 될 수도 있는, 아니면 표현주의적이라고 부르던지, 그것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사탄 같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사탄은 발음하면 발음할수록, 한국말 같은 느낌이 있다. 사무엘 바버의 아뉴스 데이도 그렇다. 광주사태 이후, 코스모폴리탄들은 매우 심각한 번민과 두뇌회전에 빠지고 만다. 한국이 하나둘씩 강하고, 경제력이 있고, 똑똑해질수록, 에세이적 능력은 일천한 가운데, 사탄이 내려 앉거나, 있던 사탄이 커지거나, 한국 천주교에서 추기경이 네 마리 다섯 마리 생길 정도로, 아니면 태고종부터 우리나라에서 사탄이 있었다는 스토리가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주의적으로, 혹은 자기 몸의 에드문트 훗설 같은, 그렇게 슬픈 죽음의 모습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 한국에서 광주사태가 발생했으니, 미국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나타나겠는가? 에드문트 훗설로, 혹은 과거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는 유럽의 미학집단처럼.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미제사건 미제사건 그렇게 불러서, 미국 애플사가 심드렁해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들 갤럭시도 지금 에스텐이 히트를 쳐서 그렇지, 굉장한 고비에 있었었다. 광주사태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도 그렇다. 사탄은 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적으로 자유를 느끼고, 종속을 의식하는 것처럼, 사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이 유한하고, 동시에 무한한 것처럼, 사탄도 유한하고, 유한한 것이다. 우리가 유한양행을 무의식적으로 좋아한 것은, 그것이 갖는 원천적인 엑소시즘의 능력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갖는 무한적인 가능성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무한적인 가능성을 느낄 때는, 내 아들이 서울대를 가는 것처럼, 나는 못 갔는데, 내 딸이 어려운 바하나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을 치는 것처럼, 나는 듣기만 내내 들었는데, 정말이지 이런 것이 신학인가 싶게, 기쁘기 한량이 없지만, 사탄에게서 무한적인 가능성을 느낄 때는, 어딘가에 가서 편안하게 죽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문명을 경험할 때, 동시에 사탄이 있었다는 성경의 보고가 맞는 것이다. 정확하게 사탄의 이미지나, 형상,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의 묘사가 없다. 우리가 사탄과 싸우고 나면, 전쟁하여 몇 명만 돌아오고 나면, 여자들의 발뒷꿈치에 그들이 밟혀죽을 것이다는 예언이 다만 신비한 예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드디어 세상이 밝게 개인 상태, 비긴 어게인, 그런 것을 뜻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영화는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미국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사탄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저마다 사탄과 싸운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필연성의 단순성을 지적한 사람이 있는지, 에드문트 훗설, 이제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자와 동화가 되다보면, 티비는 기본적으로 사탄의 소굴이다. 그들의 연락책이고, 복잡한 전신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삼세계의 거리를 여행하다가, 그와 같은 전신주를 만나고는 깜짝 놀라는 것은, 우리들 옛날에도 그런 것이 있었고, 그것이 그만 티비와 비슷하다는 인상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철주야 노력하여서, 티비를 그만 우리들의 친구로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다. 현상학은 그와 같은 평면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의, 나만의 해석, 일종의 주장 같은 것으로서, 판단 중지라는 말은 어쩌면 반드시 선악에 관한 고등한 가치 판단을 뜻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생각이 살아있는 것인데, 그것이 많다보니 중지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우리가 불교에 귀의할 때이다. 우리가 불교를 사탄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불교를 우리들의 잃어버린 옛 집이라고 여겨서, 몸과 마음이 나처럼 완전히 동화되어 그런 것이다. 우리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겨우 현대적인 자본주의에나 향했지, 역사나, 유교, 특히 불교 같은 것에는 한 번 싸워본 적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의 기미가, 아예 없진 않았다. 우리가 그 깊은 영화관 안에서, 녹색의 가와사키 네이키드를 타고는,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분명 세계관적 직관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천녀유혼과 동방불패는, 그것이 또 다시 앙코르와트, 나오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현상학인 것 같아도, 매우 뿌리 깊은, 건축학적인 시스테매틱 큐비즘 같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천녀유혼에서의 불교는, 매우 적라라하고, 유교와 하나이며, 유불선이 하나이다. 어쩌면 유학의 유일한 양심은, 한 사람의 남자 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부터 사탄이며, 자기의 육체부터 사탄인 것이다. 우리가 왕이 된 남자에서, 한효주가 웃는 것을 두고, 모나리자 사탄 계열의 표현주의라고 두려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효주가 젓가슴을 말한 것은, 어쩌면 사탄주의 계열로써 젓가슴이 없는 것을 뜻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는 상상이지만,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발자국이 많은 것이다. 사탄은 인간을 가리켜, 전부, 그리고 주자를 가리켜, 육체까지 자기들 것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세상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도형이 그렇게 일치하는 것이다. 천녀유혼이 두 번 다시 나오기가 어려운 것은, 청사에 길이남을 명작이 된 것은, 우리들 나라에도, 일본 나라에도, 그리고 중국에 걸쳐 매우 오랫동안 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고, 판단중지이자, 표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니키타도 그렇고, 가따나도 그렇다. 사탄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아멜리에도, 레옹도, 롬멜도, 우리들의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면, 사탄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은 가난하고, 가난해서, 부유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여자가 귀신이 아니고서는 과연 훌륭한 남자와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 임신이 의심스러운 것의 구조와 역사가 전부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들의 역사에 유학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인지, 자문케 하는 것이다. 스스로 적막한 가운데, 학문의 높은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 유리하고, 탐욕에 조금 발을 담그고 있고, 여자가 민중을 향한 귀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이 먼저인 상태로,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항우본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사마천이 미래 열기를 쓰고, 그러니까 중국의 미래의 역사를 쓰고, 그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들에게는 현재의 역사를, 그리고 곧 불어닥칠 미래의 사태를 예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방본기는 그저 그렇다. 항우의 마지막이 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워서, 우미인이 사탄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항우가 늘 그렇게 열정적이고, 유학의 불꽃이 죽음에 이르도록 꺼지지 않아서, 사탄에게 잡아먹혀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으로만, 한고조 유방의 미래가 우리에게 닥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영화는 예로부터 사탄의 것이었고, 산타나, 중국 영화는 수준이 사탄의 것이며, 일본은 그것을 아는 통신의 사람들에게 항상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우스우나, 원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관심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의 가면을 쓰고는, 오모시로이 하나, 자기들끼리는 그렇지 않고, 세계 경영의 측면에서도, 그것을 어째서, 누구의 휘하에서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다나카 아웃, 와타나베 아웃, 웃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자들도 기자지구, 새로운 표면으로써, 나에 의해 기가 막히게 조각되어서, 사탄의 입각체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끼리 파티를 하고 있으면, 아직은 착한 마음이 두루두루 있는 것이다. 스톤헨지도 그렇다. 사탄은 자기들의 기념품인 줄 아나, 우리들 눈에는 그랬다가, 안 그랬다가, 일종의 플랩 시계처럼, 막상 갖고 있으면 시끄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사각형의 입방체가 그렇게 감동적인 것은, 결국은 그곳까지 구원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구원적인, 구원자적인 자기 의식 같은 것이, 지나치게 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살아있다는 증거에서, 그와 같은 단순한 단계에서, 반드시 진화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댓글들이 요즘에는 화제다. 댓글자들만 모르고 있다. 이번 소나타 신형이 결국에는 거기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큐비즘이었는지 모른다. 애꿎은 기자지구 사람들이 있듯이, 스톤헨지가 사탄들이 손을 씻는 장소이듯이, 댓글자들 사이에도 들꽃 같은 사람들이 있을 뿐더러, 심지어는 사탄의 글씨일지라도, 누군가에는 옛 사람의 육성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댓글자들이 미세먼지를 만든 것인가? 우리들의 티비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가져오고? 불쌍한 김주열 열사가, 훌륭한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케 하고?...... 댓글자들이 미세먼지를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연필을 돌려 깎다 보면,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반드시 깎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바버의 아뉴스 데이의 클라이 막스에서 내려가다 보면, 나의 사탄 생각이 반성되는 부분이 반드시 있고, 그것이 불완전하면, 도리어 내가 사탄이 되는, 그와 같은 눈물 法이 있는 것이다.....
항우는 사탄과 싸웠던 사람일 수도 있고, 그와 같은 논리적 한계 아래서, 항상 댓글자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언젠가 표현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떤 권력 아래서 받은 먹을거리라고는 막걸리 밖에 없는 사람들이, 고등학교 그 바쁘고 어려운 시기를, 하교하여 집으로 왔는데,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막걸리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고를 다니고 있던 사람이, 여자가, 막걸리를 두 잔 세 잔 먹고, 수학문제를 풀다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과거에 했던 말이, 썼던 글이, 생각나고 그런다. 몇 문제라도 풀었다면서,
그렇게 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유방을 싫어하고, 나처럼 항우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취향적인 측면에서보다, 고등한 비평과 사유의 결과에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
.....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가가 예술이 되어버린 슬픈 인생..... (0) | 2019.06.04 |
---|---|
우리는 지금 신비로운 시간을 살고 있다. (0) | 2019.04.08 |
우리는 항상 (0) | 2019.03.21 |
전쟁 이후 (0) | 2019.03.12 |
영원한 김홍도 (0) | 2019.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