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
전쟁 이후, 그것의 숱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절대적 고독과 목마름이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발상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판단하고, 반성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숨가쁜 사회적 사건들이 어떻게 연쇄되어 생겨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전쟁이 실제로, 사람들을 단련케 하고, 연단케 하고, 용기를 갖게 하고, 새벽 기차를 타게 하고, 달리는 기차에서 내가 먼저 뛰어내리게 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을 생각하게 하고,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으로, 사람들을 보다 깊이 있는 존재로 이끌었다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전쟁을 도리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은 실제로 사람들을 그만큼은 이끌어준다.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조차, 펜싱칼을 사용했던 시대 때부터, 나중에는 피스톨, 유럽에서 심심치 않게 이뤄져 왔던 듀얼에서 연속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보쌈이 되어, 남은 자에게 넘어간다. 혼자 명상하는 생각이 많아지고, 친구가 뭘 먹지 않고, 자기 옆에 있다 보니,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선생이 죽도록 때려서, 아이들을 두렵게 하고, 책을 읽게 하고,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하는 것과는 다르게, 동양에서는 귀족을 귀와 연관지어 생각하곤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연상이 되지 않던 귀족들은, 아무튼 그들 사이에서 젊은 사람이 한 명씩 죽는 것을, 거대한 모순율로써 받아들이고, 두꺼운 책들을 읽고자 하고, 두꺼운 책들을 서재에 놓고자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안개에 휩싸인 포석정을 두고, 어느 누구를 찾아가 비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것이 그렇게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무의식이 어떠한 미세 결정 아래 진행되는 지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의식은 무의식의 결과이다. 그리고 의식과 반성, 사유는, 무의식의 힘을 두고서도 같은 정도의 힘을 발휘하곤 한다. 무의식의 힘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에서, 사유의 힘에서도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식이 없고, 사유에는 단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면서, 무의식의 거대한 힘을 관활해야 하는 직급의 사람인 경우에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귀신에 씌우거나, 사탄이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문을 지나서 오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클래식이라는 말은, 키가 큰다는 말도 있지만, 보통의 귀가 큰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이 큰 것에는 우리들의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가 커진다는 뜻을 오래도록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은 무엇일까? 전 세계의 기자지구의 것들처럼, 섹스일까? 전쟁이 있을 때는, 종군기자의 위상처럼 눈물나고, 돌아와서도 그의 경력을 높이 사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옛 사람의 글들을,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읽을 때, 숨이 끊기는 것 같은 것은, 하나는 한없는 진실함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거대한 저수지의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레토릭 때문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으는 사탄이 있을까 하는 착상이요, 발상 때문인 것이다. 전쟁과 종군 기자는 자칫하면 같은 저울에서, 같은 무게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차마, 두 차례의 현대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그와 같은 인물을 치앙마이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니까 몰랐다기 보다는, 귀신을 본 것처럼 두렵고, 떨려서인 것일 것이다. 그렇게 유럽은 오래도록 변증법에 노출되어 왔는데, 우리는 그 맨 처음이 내가 죽는 것처럼 두렵고, 함께 죽자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러자 대답하고 싶은 밤의 연속을 살았던 것이다. 무의식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의식은 결코 지구의 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해가 지고 사람들을 잠 재우면 무의식도 잠이 들고, 해가 뜨고 사람들을 일하고 공부하게 하면, 어느 정도 무의식도 의식의 구호에 맞춰 뛰고, 노래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하였던 것이다. 무의식이 금방 무언가를 잊고자 하면, 우리는 말 그대로 팡세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표준어 같기도 하고, 전라도 말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무의식이 그렇게도, 사람들의 도전이 되었고, 사탄과 천사의 대결과 결투의 장이 되어 왔던 것이다. 레토릭은, 아지랑이는, 내가 언젠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던 방법처럼, 신작로에 피어오르는 것을 모두 담아다가, 신문사에 보내는 것이었는데, 반드시 사람이 사탄을 인지하는 길목이 되었던 것이다. 무의식은 결코 진행할 수 없고, 의식도 아무런 진행이 없는 판에, 섹스는 다만 운전석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이고, 옆 사람의 얼굴이 연장하는 것인 것이다. 사람들과 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들이 서로 상충하고, 대결하며, 누구는 천사의 칭찬을, 누구는 악마의 오명을 받게끔 되었다. 지금 내가 거기다가 마치 오래 전부터 있던 것처럼 덧붙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음색인 것이다.
무의식은 의식의 근거이다. 원인이고, 영화적 장르로서의 범죄와 섹스이다.
우리가 차이코프스키의 소품을 듣고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했던 것은, 결코 레토릭에 반응하는 우리들의 기계적 영혼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은 기계 때문에 살고, 기계 때문에 죽고 한다. 피라미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어린왕자들처럼, 어린왕자라고 하기에는, 이미 거의 모든 문명을 지향하는 왕의 철학처럼, 그러니까 옥쇄라는 것은 기이한 표현인데, 어린 왕을 자기의 신분을 알려주지 않은 채로, 어려서부터 가난해도 공부, 배가 불러도 공부, 뭘 먹어도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공부, 교회에 나가도, 불교에 나가도, 천도교에 나가도 공부, 공부에 공부를 더하고, 라디오를 듣다가 공부를 배신하는 유다가 되었다가, 공부를 놓치고, 서둘러 아침 일찍 대신에 학교에 가서 밀린 숙제를 할 것이다는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뛰어가는 모습 그 자체가, 조선 임금으로서의 옥쇄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사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옥쇄로 있다가, 영화도 보고, 소풍도 가고, 단팥빵도 먹고, 미팅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프랑스 영화가 몰락하고, 독일영화는 기억에, 우리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진 것이, 어쩌면 그와 같은 한국 영화의 음색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듣기에는, 어설픈 연극적인 향기를 내뿜고 있어도, 의미가 회전하는 마음의 옥토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발라드. 그것이 고전 음악적인 것이든, 민중적인 춤곡인 것이던 간에, 한국 사람들이 말을 하고, 남녀 간의 씬을 만들고, 조용히 걷고 있으면,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되었던 것이다. 레토릭은 기계적인 것이고, 양적인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명사들이 이음절로 리드미컬하고, 그것의 이음새가 영원토록 화려하다고 해도, 한국말만 주구장창, 모국어만 밤낮없이 말을 한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음악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음악 없이 책으로 진행하고, 음악 없이 전쟁에서 돌아올 수 있을까? 음악 없이 어린아이를 키울 수 있고, 음악 없이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말은 늘 그렇게, 어느 공간에 가고, 어느 집에 살아도, 붙박이 장처럼 굉장한 크기와 성능의 오디오 시스템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짜증이 나도, bel astre, 화가 나도, bel astre, 취직을 못해도, 중국의 마지막 황제처럼, 편의점 파라솔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bel astre 하는 것이다. 외국은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신경을 쓸 때는, 우리가 공부에 방해가 되는 때가 많듯이, 음악이 철저히 차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 제목처럼, 흠흠신서, 누군가 내 옆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흠흠거리다가, 중얼중얼거리다가, 그러면서 손에 뭘 쥐고, 운전대를 쥐고, 어깨에 가방을 메고, 책상에서는 익숙한 서류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음악이 되고, 모든 생명은 반드시 선율이 된다. 사탄이건 천사건,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하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우리들의 상상이겠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생각보다, 때로는 거의 노골적으로, 사탄의 영토에서는 항상 시체들이 음악과 함께 하였다. 우리들이 아름다운 음악제를 연다 싶으면, 기분이 대관령이나, 언젠가는 개마고원처럼 신선해지고 높다랗게 되지 않는가? 서양이 항상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와 같은 형이상학이 제거되지 않는 것은, 그것의 마지막 핑계는, 마지막으로 펴게 되는 손가락은, 한국말 음색의 절대적 현상인 것이다. 그림자 뿐인 세상에서, 절대적이고, 이성적이고, 국가적인 규모의 판단력이 있는 마지막 유러피언인 프리드리히 헤겔이, 그와 같은 의도를 갖고, 그의 형이상학적 이야기의 피날레를 구성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들의 음색은, 우리들의 생각일 때가 많다. 그렇게 서양 사람들이 살아있는 채로 악기가 되어, 한국 사람들을 죽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영원토록, 매우 흥미진진한, 어린 학생들에게는,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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