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업할 때 쯤이었다.
나는 아직도 삼각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사람은 만나는 시각이 제각기 정해져 있는 것이다. 내가 샤라포바를 좋아하고, 샤라포바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이 용인하는 이유는, 둘이 만나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플라토닉한 건가부지. 혹은 때로는 에로틱한가부지. 그러한 것이다. 샤라포바가 한국에 나타나서, 한국에서 지도자로서 활약을 하고, 별다른 유망주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싸돌아다니면, 그때부터는 둘이 만날 수 있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만남의 광장에서 만날 수 있는지, 손가락을? 세어보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만남은 손가락으로 되어 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이다. 두 개 동시에 깨물면? 동시에 아프고, 세 개 동시에 깨물면, 동시에 아픈 것이다. 어쩌면 에이치지웰즈도, 자기 자신의 창작 기법과, 상상의 가공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철저히 감추어 놓아서 그렇지, 밝히고 나면, 사람들과 함께 유튜브에서 생각을 주고 받고 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충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치지웰즈가 헤겔과 공모해서, 이차대전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헤겔과 에이치지웰즈는 세계대전의 필연적인 물리적 결과를 향해 가는 인간을 두고, 다만 사회적 반영으로서의 소설과, 시대정신 같은 것을 들어 밝힌 것 뿐인 것일까? 우리가 오손웰즈?는 싫어하더라도, 에이치지웰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슬픈 사각형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조금 의외다. 우리가 에스에프를 파고듦에 있어서, 과학적 사실은 하나도 남는 것이 없고, 철저히 센치멘탈리즘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내 눈에 안경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와 같은 효과의 투명한 결과가, 일종의 고강도의 일레트릭 빔처럼 도시 공중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어느 누구도, 동해산 오징어와 더불어, 카이로의 피라미드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가 수사의 방향을 지나치게 오징어로만 향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교양 없이, 그런 것의 가능성이 없이, 잘생기기만 하고, 돈만 많은 것 같고, 차만 자주 바꾸는 사람을 오징어라고 부르고, 우리들의 모임에, 어떤 모임이든 간에, 그가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의 단편적인 그림이 소설의 전부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소설적 사실이다. 그것은 애드가 알랜포우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났던 것들이다. 모든 현상은 네메시스적인 징벌을 받는다. 그렇다면, 신흥 국가 미국의 북부 지역이 현상적인가? 아니면 남부가 현상적인가? 참 그런 것이 우습고, 이상한 카테고리 같고 그런 것이다. 어셔가의 몰락 같은 것이, 조금은 남부지역의 네메시스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가라는 것은, 대게가, 그처럼, 자기를 적당히 부풀리고는, 시간과 시대정신의 합리적 네메시스를 그려내는 것으로 그치곤 한다. 어셔가의 몰락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그것이 매우 인간적이라는 사실에서이다. 전통은 결코 공포에 앞서지 못한다. 그러나 공포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다만 표현할 뿐, 무엇인지, 정확히 인과가 어떻게 되는지, 자기로서는 모르겠다 하는 것이 소설의 숨은 그림이다. 하지만 공포를 잘 묘사하는 작가를 대동시키고, 그것의 인문학적 전제만을 잘 맞춰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에드가 알렌포우는 그 자리에서 증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중간 단계에서의 표현이라는 것은, 이중나선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시스템 창호와 같이, 내외가 동시에 열리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있다는 것은 거짓인 것이고, 작가가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리얼리즘인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다가, 작품의 주인처럼 굴다가, 나중에는 공포에 질리게 된다면, 그것은 시간이 정확한 것이다. 해서 포우의 우리들의 주자 상태에 대한 영향은, 이름과 소문, 그리고 귀엽고, 매서운, 때로는 잘생긴 얼굴이 있으면서도, 매우 미미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에이치지웰즈에게서도, 그와 같은 소설의 계보가 똑같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래, 돈이 있으면, 서울,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에이치지웰즈 논문을 써보려고 했다. 나는 손가락을 한 시간에 하나씩 깨물고, 어느 때는 두 개씩, 세 개씩 깨물어서, 사람들이 나를 두고 오징어라고 부를지, 아니면 안 오징어라고 부를지 내 자신과 내기를 걸어보기로, 나와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여건이 좋지 않지만, 빨리 닥쳤고,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보통 검수원 용지에, 현대 하는 영문 스팰링이 길다 싶으면, 에이치디 하기도 한다. 머스크 하는 스팰링이 길다 싶으면, 엠이라고 적기도 한다. 에이치디하는 것이면, 할리데이비슨과 겹치게 된다. 그런데 항구 안으로, 할리를 타고 들어와서, 뭔가를 하고 갈 일은 없기 때문에, 내 마음으로만 겹치지 겹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에이치지웰즈도 그렇다. 내 이름과 겹치지만, 여기서는 잠깐, 조금씩 많이 겹쳐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영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영어에 관한한 같은 어려움의 밀도에, 그와 같은 정신의 탑에, 같은 기단에 설 수 있을지, 궁금한 것이다. 만일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나, 옥스포드 영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려고 할 때, 나와 영국 사람을 놓고, 둘 모두에게서 허가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이고, 둘 모두에게서 그런 것은 받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둘 모두, 자국어만 할 줄 알고, 영어나 한국어를 겨우 하는 것이면, 별다른 문학적 교양도 없이, 문제는 그때는 매우 단순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문학에 대한 교양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부터는 예상대로 굉장히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영국 사람이 셰익스피어를 모르겠는가? 영국 사람이 셸리나 키츠를 모르겠는가? 그리고 안다는 것도 대충 아는 것이 있고, 과자의 포장지만큼 아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한국 사람이 조금 문학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저런 비유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현상은 현상일 것이기에, 대충 영국 사람에게 뒤늦은 교육을 시킨 다음에, 옥스포드에게만은 영국 사람을 입학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의 머리 속에는 지금 무엇이 있는가? 그러한 것이다.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한 구조의 우주 전쟁의 머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하루하루 배우는 나 자신의 차이가 너무 현격해서, 뒤늦은 출발과, 중도에 그만두고도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같은 가공의 높은 탑 안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한 시험의 성적을 갖는 사람들을 실재로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불교의 탑을 볼 때, 기단을 층으로 계산하지 않는 것이 항상 이상하다 했었다. 삼층석탑이라고 하면, 우리가 보면 사층인 것들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대학에 들어가서인 것이다. 천차만별인 것이고, 그들 교수와 고급 학생들 간의 교류가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 잘 헤아려지지가 않았었다. 우주전쟁에서의 박테리아가 일종의 성적 관심일 수도 있고, 성적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 자체가 그렇게 고급스러운 것은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은 무덤이 영국에는 얼마나 많고, 전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많겠는가? 문학교수들도 셀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은 스스로 무너지는 박테리아와 같고, 오징어와 같으며, 우주전쟁의 소설과 같고, 그런 것이다. 그에게서 발견이 되는 것은, 하늘에서나 포착이 되는 나스카 문명의 그림들과 같다. 사람들의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늘을 날고, 신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큐멘타리로 만들어서, 저녁에 함께 시청하는 것까지인 것이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영국 사람들도 영문학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박테리아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오징어 때문이다. 틈만 나면 싸우고, 틈만 나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오징어도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네메시스트들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를 보면,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들을 보면, 제작하고 소비하는 것들의 일년, 이년, 십년 넘는 우주를 보면, 그나마 에이치지웰즈의 칵핏에도 영원히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
내가 졸업할 때 쯤이었다. 나는 원래 박테리아 연구가였고, 하지만 섹스 때문에 영혼이 분열되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었다. 학교에서 바라다 보이는, 안녕리 높은 하늘이, 어느 날에는 정답게 보이고, 어느 날에는 상상을 자극하였고, 그 시절에 대부도나 제부도까지 다녀올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터인데, 군대를 대신 강원도 아주 깊은 곳까지 다녀와서 충분히 대응을 하고 있었었다. 경제학과 조교가 그렇게 예뻤다. 잘 하면 나의 귀한 팔이 될 것도 같았다. 삶은 때로는 소박한 것이고, 소박하게만 봤다가, 제법 멋지다 싶으면, 오직 그와 같은 미학으로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도 그런 목소리를 많이 들어와서, 채널을 그렇게 세속적인 적당주의, 양적 포석주의, 그렇게 해놓고 있었었다. 전화를 걸어, 가볍게 하늘이 밝고 좋다는 말을 했었더니, 내가 한신대를 다니면서, 여자가 단 한 번도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은, 목소리의 주파수를 보이는 것이었다. 돌고래 같았다. 열정으로만 하면, 광주의 미정이를 닮은 것도 같았다. 조교실을 청소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오징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들과 딸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같은 태도를 견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에이치지웰즈의 표현처럼, 동해의 오징어와 카이로의 피라미드를 함께 엮을 수가 없었는 것이다. 그나마 성실하고, 만남이라는 피라미드 그림 같은, 만. 남. ㅁ. ㄴ. ㄴ. ㅁ. 그런 소규모 역사를 거친 다음에, 영화를 억지로 내가 간청하여서 보고, 내가 하는 말에 좋아하는 구석을 보이고, 다음 전화에다가 그런 목소리를 내게 보였다면 내가 놀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한 바 육체파 여배우를 내가 만난 것처럼,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감독의 권력으로서, 세상 소설가들이 호시탐탐 네메시스를 노리고 있을 공중이 뻔한데도, 그러니까 한 열 번은 만난 것처럼 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목소리를 내비치는 것이었다. 나도 여자가 좋다는 말이었다.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많이 미안했고, 일종의 순결한 영지주의자로서,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김홍도 (0) | 2019.03.04 |
---|---|
개인적인 인격성과 문학적인 인격성 (0) | 2019.02.25 |
세 개의 본질에 관하여 (0) | 2019.02.20 |
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불쌍한 드라마적 불교의 광경을 보면서..... (0) | 2019.01.23 |
눈물의 왕이 된 남자 드라마 (0) | 2019.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