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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세 개의 본질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9. 2. 20.

세 개의 본질에 관하여 





사람들은 본질이 구멍가게의 사탕이나, 이런저런, 갯수가 있고, 그것이 세 개인가 할 것이다. 본질이란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처음 들었을 때, 얼음과 하얗게 된 연탄재와, 그런 것들을 함께 보던 것과 동시적으로, 알고 싶으면서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었다. 의미라는 것도 그렇고, 그것은 대게 숨겨져 있다고 하고, 본질적인 의미라는 것도 그랬다. 우리가 시험에서 그런 것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순자나 맹자, 공자나 장자, 그런 것들의 인용과 차이는, 시험에서 나오면 반가우나, 시험에서 나오면 짜증이 나고, 시험에서 나오면 이런 식으로라도 공부인가 싶고, 시험에서 나오면 이런 식으로...... 그 모든 것들이 다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본질적인 것을 아는 것으로서, 처음의 본질을 확보할 수 있으나, 본질은 대게가 공간을 요청하여서, 결국에는 공간이나 시간, 만남의 광장 같은 것, 그런 것이 없는 것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와 본질적인 가치를 대립시켜 놓으면, 본질이란 말은 더더욱 근거가 없고, 어디에 쓰는 말인지 알지 못하지만, 세상적인 가치에서는 버려진, 그러나 우리가 차마 버리진 못하는 것 중에 하나라는 인상은 받는다. 우리가 전화를 받으면, 리듬이 깨지게 되고,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생각이 단절이 되며, 철학자처럼,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는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정말이지 의미의 천상계, 그것의 불가능한 확률로써 그러했다면, 그만 생각이 단절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직장을 구하고, 직장은 우리에게 직장을 내놓으라고 하고, 가족을 갖게 되며, 처음에는 다만 연인이었는데, 가족은 내게 팔과 다리 전부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직장인이, 길을 잘못든 것처럼, 동네 도서관에 들러, 도서관이란 본시 냉랭하여서, 다정하지 못해서, 아이들에게는 기회와 염탐의 천국, 문학잡지에게는 마지막 사진관과 같아서, 예수님의 지도와 채찍질 같은 것은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입시 준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청년이 있으면, 다만 조카 같고, 사촌 동생 같고, 그럴 뿐인 것이다. 도전적인 도서관장이, 작고 허름한 도서관인데도, 가꾸고, 시인까지 초대해서, 사람들 앞에서 화형식을 거행한다면 모를까, 도서관은, 도서관은, 옆에 코디나 매니저가 없는 한물간 연예인 같을 뿐이다. 국화꽃 향기가 가을에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스즈키 카따나가 아름다운 단풍길에서, 그것도 마지막 화형식을 거행할 때, 우리는 그것이 드러나는 것 같으면서도, 사라지는 공간을 확인할 뿐인 것이다. 대학의 도서관이 가장, 조선소의 거대한 배와 같고, 그것을 짓고 있는 풍경 같다. 기업적 현상이, 도시의 높은 스카이라인이 활발한 거대 상선이나 유조선, 거대 비행기 같을 것이다. 우리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을 때, 돈이 아니라, 그것이 마이너스인지, 혹은 플러스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마이너스 천국, 마이너스 세상에서, 책을 대출받는다는 것은, 돈이 아니라, 분명 홈플러스가 마땅하나,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든지, 그러니까 본질적 가치로부터 거리가 있는 것일지라도, 그와 같은 기호적이며 세상적인 문법의 흐름일지라도, 타이트하게 내가 임하고, 사람들과 함께 경쟁하던 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러니까 아내가 매우 아름답게 변해서, 속옷을 멋지게 샀는데, 그것을 집을 오르는 언덕 어딘가에 놓고, 버리고, 저녁에는 아내에게 어째서 그것을 입지 않았느냐고, 약간은 대학로 사이코 연극 같은 대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적이고, 육체적이며, 분명한 것들은 우리는 입는다. 하지만 조금만이라도 관념적으로 흐르게 되면, 의식주의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는다는 것, 돈이 아닌, 그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책은 분명 순식간에 녹는다. 교과서나 녹지 않지, 교과서나 입시서적이 아니면, 모든 책들은 개인의 주자적 현상 앞에서 녹게 된다. 그와 같은 녹음이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절박하게 고급한 드라마를 찾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자를 보면, 놀라게 되는 것이, 그는 아직도 영단어가 파리처럼 윙윙거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표징 같은 것이다. 반드시 그런 아이들 중에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는, 나와 사람 같은 B가 있었다. 영어까지 잘하고, 자기 몸을 탱크처럼 만들어서, 페퍼고그?처럼 만들어서, 영문학의 거리 위에다가 최루탄을 쏘아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결과적으로만 보아서 그렇지, 시작을 보게 되면, 늘 신기하고, 가슴이 아프고 그런 것이다. 우리가 과학을 그렇게 노력하였던 것은, 실제적으로 배가 고팠기 때문인 것이다. 그와 같은 단순함을 묻고, 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버스에 탔고, 버스를 타고는 강물에 흘러갔으며, 하지만 직장을 구하고, 호구지책이라도 해결하고 나면, 그와 같은 형이상학의 흐름에 우리가 매우 심각하게 내던져져 있었다는 것을 모두 잊게 된다.  


아파서 누웠으면, 드라마를 보게 된다. 음악을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 드라마를 구성하게 된다.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못보던 처녀가 울고 있고 그런다. 


어째서 세 개의 본질일까? 그것은 하나의 본질이 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혼자 중얼거렸는데,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맞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는 왕이 된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로맨스는 별책부록, 다른 하나는 바벨이다. 본질적인 것은 음악적이다. 우리가 하나의 음악에 하나의 의미만을 집중할 수 있다면, 본질이 갖는 심리적 경향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우 이질적인 다면젼을, 다면체 디멘젼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의 스토리를 갖고,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가장 떨어지는 것이 로맨스는 별책부록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분발하였고, 작은 라씽 리어카를 갖고, 이야기의 바깥과 내부를 바삐 오가는 것을 보았다. 구조 자체가 좋았고, 다만 소재로써 서울대 입학을 허락하는 케이스, 극히 드문, 있을 수가 없는, 자칫 저녁에는 위태로울 수도 있는, 그런 모습들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떨어뜨려놓아도, 옛날 김우중 회장의 사원 교육에서처럼, 오직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잘 헤쳐나가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세 개의 본질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것에서, 충격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주자가 아닌 책을 내가 구입한다는 것은, 도서관에서 돈을 대출받는다는 것은, 플러스인가? 아니면 홈 마이너스인가? 식자연하는 의식의 대지, 가면 갈수록, 시각적인 키의 마이너스. 우리가 대학을 기억하는 것은, 실로 주자학인 것이다. 키의 마이너스의 지속적인 현상학이 그나마 대학에 들어가서, 놀랐던 것은 미팅이었다. 미팅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뭘 배우고, 저녁에 술을 쳐먹게 되면, 그렇게 김범수의 노래가 아스라한 것이다. 그와 같은, 천국 같은, 영원한 사이클 같은, 일본 아스카 문명 같은, 야요이 문명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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