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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눈물의 왕이 된 남자 드라마

by 마음대로다 2019. 1. 16.

눈물의 왕이 된 남자 드라마






우리는 우리를 두고 남을 보게 되어 있다. 훌륭한 사람들이란 그래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점들을 모아서, 보석으로 만들고, 그 보석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훌륭하고, 보다 어려서부터 훌륭해서, 한글을 모를 때부터 훌륭하여서,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것은, 문자를 모른 상태로 말이 먼저 통하는, 그 풍요로운 전제가 없어서 그럴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린아이는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쪼그만 아이가 커서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까 싶은, 그런 높은 상상의 세계를 우리 서로 갖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조선의 실정. 과학의 시대를 알아보지 못했고, 계속해서 알아보지 못했고, 그것의 철학적 근거를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상하게도, 전쟁 이후에, 그와 같은 어린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콘테이너에서 쏟아지는 곡물처럼, 끝없이 의심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은. 만일 조선이 실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 과학이 중성적이긴 하나, 끝내 사탄의 것이 될 것이기에, 가장 나중에 조선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면 어떻게 되는가? 멀리 보이는 공장의 겨울 풍경을 보고, 저렇게 훌륭한 건물들 안에서, 사람들이 입고 쓰는 옷감들이 나온다고 하니, 정말 감동적이지 않는가? 그렇게 말을 하고, 그런데 그런 감동으로 보지 않는 것은,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입고 쓰는 옷감만이 아니라, 무기 또한 나와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내가 여기서 북을 치고, 쪼르르 달려가, 거기서 장구를 쳤던 것일 것이다. 무심한 옆의 사람도, 처음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조선의 열쇠를 본 것 같았다. 과학은 굉장히 우스운 것이고, 결국에는 모든 인이 사라진, 철학과 문학 그런 것이 없는, 사탄의 세상이 기반으로 영원히 할 수 있는 것인 것이다. 우리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가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안내양 누나와 말씨름을 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고,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다가 대학을 다니고, 그런데 배우는 것이라고는 소월시 사상 연구 같은 것인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데카당스, 데카르트와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술을 마시게 되면 공부를 못하게 되니까, 그런 우여곡절과 파란만장 사이에서, 시가 어떻게 기가 막힌 피를 쏟고 죽는 것 같은, 그 알 수 없는 영혼 같은 것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문학적 가치로 높이 사고, 때로는 그와 같은 어이 없는 존재에 우리가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어가, 날창날창하였다. 이런저런 구들로, 영어처럼, 단속되고, 타이트하고, 벨트를 멋지게 하면, 일종의 의미의 명사화, 문장의 단정화, 부정확한 의미의 진화 같은 것이 생기는데, 우리 말은, 마땅한 관념적인 국어 사전도 없이, 중세의 호락 논쟁 같은 것은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결국에는 무시무시한 은는이가, 한국어 맞춤법, 원고지 문법에 맞게 쓰기, 의인화, 두음법칙, 원순모음화? 그런 식의 단속과 미세만족 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고, 철학용어가 일제 때의 잔재라고 하고, 그렇다면 그에 대한 한국어적인 대응어는 이런 것이다고 하고, 함께 이런저런 철학적 기본을 새롭게 한국어로 한다면 이런 것이다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피해가고, 다른 이슈가 많고, 자지들도 많고, 여배우들도 많고, 그렇다고 보면, 차원의 틈이 생기고, 그와 같은 차원의 틈으로 사람들의 시간이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배우면, 조선의 역사로 썩고, 이어령을 읽으면, 이어령 혼자만 있는 것 같고, 그나마 아카데믹한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절대의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네처럼 보여서, 사람들의 불만을 오히려 그에게 쏘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다. 시가 진보를 가져오면 좋으나, 사상이 무섭고, 넘치도록, 그것이 헛된 것인지 아닌 것인지, 대학가를 장악하는데, 미국이 공포영화까지 상품화하는데 성공한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런 시간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개인적인 면면은 늘 언제나 전설의 고향이나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맴돌고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공포영화 찍는다는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시험관 아이 같은 것으로 생각해 본다면, 영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이다. 팔십년대를 보면, 바로 그와 같은 대결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문학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라는 피가 기억이 난다. 그것의 상보적인 관계는 알고 있으나, 우리들 사대부 청년들은 궁극적으로 영화를 찍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잠실 롯데 타워를 꿈꾸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훌륭한 팝송을, 보다 세련되고, 보다 시뮬라크르 상품 관계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노래들을 쏟아내면, 마이클 잭슨이나, 라틴 아메리카 계열과도 유대가 있는 전기들을 가져오면, 우리들은 금세 다 죽고 말았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그들의 장군들을 전부 다 열거를 할 수가 없다. 어떤 장군은 자기를 여왕이라 칭하기도 했었다. 결국 문학은 죽고 말았다. 그것이 미스테리이다. 문학은 무엇인가? 혼자가 아닌가? 문학을 어떻게 분신사바로 하는가? 혼자서 하다가, 여럿이 하다가, 혼자서 하다가, 여럿이 하다가, 그렇게 철기를 풀무질로 다루는 작업이 아름답고, 영화의 장기이며, 신비로운 비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방불패에서 우리가 주워들은 것처럼, 그와 같은 비법은 결국 여자들을 만들고 만다. 왜, 남자가 없는가? 영화인들은 죄다 여자이고, 영화를 많이 보면, 자지가 지워지는가? 그것은 아니지 않는가? 거기서부터 긍정하는 그림자가 비칠 수가 있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문학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문학의 듬성을 알아보는 것은, 완전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문학의 듬성을 좋아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완전의 구속이 얼마나 거대한 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듬성은, 찔러서 피도 나오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피가 나오는데, 그것마저도 구멍이 여의치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지에 전쟁과 죽음이 덮쳐도, 사람들의 의식은 서경덕마냥, 사치스러웠고, 죽음을 늘 잊어먹는 사람들 같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매우 흑백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나오는 것이라는 것은, 죄다 문학적 이상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시인이 표현되지 못한 것이 기이하고, 영 이상하고, 결과적으로 슬픈 일이 되는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도. 어딘가에 문학가가 있고, 아름다운 시인의 주인공인 영화가 있을 것이라는 가리킴이었을 것이다. 영화 동심초도 그렇고, 다른 영화들도 그렇다. 상록수도 그렇고, 여주인공이 죽은 다음에도, 학교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은, 묘하게도 고지전에 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도 같았다. 시인은 학생운동과도 달랐다. 누구 대표시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시인은 학생운동에도 있을 수 있었고, 기자도 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이 박근혜를 바라보는 것에도 있었다. 만일 그 옛날 국민학교 운동회처럼, 총장을 가운데 높이 세워두고, 적당한 주머니들로 던지게 해서, 시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예술가를 지원하지 않는 것을 탄핵하였다면, 단번에 우리나라는 시인의 나라, 예술가의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이 터지고, 피가 나오고, 그러면 자기가 그런 글을 먼저 쓰고, 고통에서 탈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예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정도의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은 우리 민중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시인의 높은 산을 바라보다가, 만나는 것은 평범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갈수록, 과학의 시대가 되고, 미국 공포 영화의 시대가 되고, 시인은 어딘가에서 쥐어터질 것 같은 잔잔한 암묵과 동의의 분위기가 되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때로는 우리들 사회에 터지는 것처럼, 누군가로부터 소설을 그렇게 권함을 받는 일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시 한 편이라도, 멋진 유미주의, 주지주의적인, 철학적 상편이 내용을 선정적으로 가로지르는, 그래서 내가 프리스트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그와 같은 편안한 정신의 습관 같은 것을 만나보면 굉장히 기뻐했겠으나, 마치 그에 대한 대답처럼 프리스트가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인간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믿음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의 믿음의 습관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문학은 서정시를 쓸 것이다. 고대의 작가가 고구려라고 이름붙여 놓고, 예쁜 여자 얼굴 하나 그리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처음에는 신라라고 하고, 믿음의 본질, 믿음의 그림, 믿음의 현실이라고 역사적 본기를 쓴 다음에, 이제는 그림을 그려보려고, 문학이란 본시 시서화 삼절과 같아서, 반드시 그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까지 공주는 등장하지 못하고, 왕들의 이름마저도 세상에서 가장 대무신왕 같은 것들만 있는 것이다. 겨우 소수림왕. 그것도 무슨 트랩 같은. 그리고는 백제본기를 쓴 것이, 결국에는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대의 작가는 혼자였고, 세상 누구의 부탁도 받지 않는 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같은 사랑 가득한 백제본기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을 문자로 그리면, 그것이 그림인지, 문자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참으로 소년소녀의 꿈이다. 그것의 맨처음 훌륭한 어린아이를 우리는 다른 데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왕이 된 남자 드라마는, 너무나 슬프다. 우리는 문학을 만날 수가 없다. 문학을 영화처럼 듣다보면, 매우 듬성듬성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을 재촉하기 때문에, 빽빽한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시각, 우리나라 곳곳의 대학, 문학과 강의실과 연구동, 대학원실과 연구동, 학교 앞 식당과 카페는 불이 켜져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조선왕가의 왕이나 공주, 무술인이나, 좌의정, 그런 사람들 같은 것이다. 모이면 영향을 받게 되고, 작가는 날개가 꺾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자기 날개를 꺾는 것의 내용이 산문의 전부일 수가 있다. 시는 서글픈 닭대가리 같은 것. 모임을 갔는데, 생닭의 목을 비틀어 잡아오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모든 문학에는 뒤늦은 후회의 기능이 있다. 그리고 화면도 종이라고 하는 매우 당연한 주장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문희를 좋아했는지, 사람들은 모를 수가 있다. 모든 영화는 저녁에 보고 나면, 뭘 먹은 것 같은 행복 이상의 것은 없을 수가 있다. 영화는 오직 영화평을 가질 때만이,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알 수 없는 평론의 밀웜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와 같은 때만이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믿음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은 거만해서,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를 방영하면 재깍 본다. 어려운 말들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통역사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도, 우리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와 같은 고대의 기둥들 안에서, 중국과 일본을 벗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빠르게 우리나라 영화를 보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사탄들이 매우 무섭게, 그들의 관심을 단속하기 때문이다. 그중에 프랑스 사람들이 약간 바보스럽기로 유명하다. 옛부터 이태리 사람들은 조금은 좋은 한국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