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트 5,6회: 절정에 관하여
요한 바오로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황은 모두 한국 사람이 하고 있다. 그것이 조금도 중요치 않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치 않는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주 옛날부터,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래도 그것은 매우 내게 낯설고 기이하며 이상한 일이 되었었다. 바오로가 죽었을 때, 친구가 죽은 것 같았고, 베네딕토가 되었을 때, 무슨 일로? 하였으며, 지금 교황은 점점 더 미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미국 대통령도 그러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죄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나의 좌절과 소외, 고통은 일거에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었다. 지금 있는 영국 수상도, 얼마나 영어를 잘하면 수상까지 되었을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소리가 그랬었다. 이와 같은 우주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많은 음식을 먹고, 많은 영화를 보고, 많은 여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일단 부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파비오 비온디, 얼마나 큰 슬픔이 있는 것일까? 미학적 비약을 행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논법으로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음식을 먹고, 많은 영화를 만들고, 많은 여행을 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도 생명 세포의 끝에서, 절망의 정신적 기운이, 육체에까지 생생한 노화로써 연결되던 시절에, 오직 그런 이상한, 적당한, 마음만 부자인, 무우말랭이 같은 연장으로써,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오늘의 인과는 오직 어제의 기억과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지금 차분하고, 현실적이며,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도그마틱한 모든 말들이, 그와 같은 한국 사람의 독재에 관한 미학적 믿음을 실제로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일그러졌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잘 지었다. 관사라는 말도 그렇다. 구조라는 말도 이름을 잘 지었다. 역사와 구조라는 말은 상보적이라는 것도, 한국어에서나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노동을 행할 때 얼마나 많이 역사에 의존했는지 모른다.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얼마나 구조라는 말이 나를 구조했었는지 모른다. 그것의 두 개의 주사위가 처음에는, 지방 방송국 정도의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영애와 김우진이 지방 방송국 사람들이었을 때, 막상 그때에는 나는 혼자 뿐인 서원의 서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내가 좀 가졌으면 하는 국가의 예산을 먹는 하마들 같았다. 어머니는 가난하였고, 존재는 풍요로웠으나, 나 또한 가난하였다. 얼마나 겨울에 난방 조차 하는 것에도 걱정이 앞섰는지 모른다. 돈이 인간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은, 돈이 사랑 같고, 돈이 자유 같고, 돈이 병사들 같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이 오늘 역사 프로그램처럼, 망국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세히 보면, 개인적 우주에 걸쳐, 세계적인 돈이 없음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 보니, 마치 돈이 많은 사람처럼, 사람이 없는 것의 경우를 이제는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상상은 옛날에도 있었다. 대신에 표현이 나이브한 것은, 다만 사물들은 도시에 홀로 남겨진 사람에게 피동적이며, 우리가 아는 사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서양 문명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역사 프로그램은 늘 언제나 내 앞에서는 수박 겉을 야하게 햝는 것에서 그치는 것 같다. 서양 문명은 돈이 없는 조선 우리나라의 편에 들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없는 일본 근대 문명의 편에 설 것인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역사는, 그런 굵직한 태평양과 대서양은 가볍게 지나는 다리들로 때로는 빽빽한지 모른다. 오늘 우리나라의 방송은 마치, 유럽 전쟁을 연상케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코메디 프로그램. 자세히 보면 재미가 있다. (어제는 스즈키컵 베트남 말레이시아 축구.) 그러다가 다른 개그 프로그램. 그러다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리고 역사저널 그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한국 천주교 단체 미사와 같은 프리스트에서 빛을 발한다. 보면서 몇 번을 아멘하는지 모르겠고, 너무나 그 불쌍한 정신현상학들이 석류처럼 빛이 났는지 모른다. 이제는 나의 역사와 구조가, 동북아 삼국의 통일은 커녕, 동남아시아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정은채가 어느 서예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시니피에를 한 번 그려본 것도 그렇게 좋았다.
우리는 고통스럽다. 과연, 테오티후아칸의 영광에 빛나는, 신학교수 신현균의 말을 믿어야할 지, 그렇지 않아야할 지, 그 어느 체험에서도 그것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드라마를 가장 그렇게, 다시 설명하고, 그리고, 평론에 종속시키거나, 평론을 드라마에 종속시키는 것 없이, 나란히 걷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과연 그 모든 권력 위에 있는 것이 확실한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다만 포르피리우스. 어거스틴을 흉내내는 사람도 없고, 아퀴나스도 없고, 헤겔조차 흉내내는 사람도 없는데, 다른 흉내라는 것은 기본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가 항상 세계 영상 문화에서 탑을 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나의 글이 그렇게 포르피리우스를 닮았다. 그것만큼은 책 권자 권력에 예민한 사람들조차 인정, 어 인정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맹진하였다고 한다. 어째서 연장이 불가능한 것일까? 어째서 자기들의 글은 눅눅한 과메기 같은 것일까? 원래 눅눅한 것이겠지만. 갓김치만 같을까? 맛있기로 소문이 난 것이지만. 표면적 연장이 연장이 아니요, 오직 속초로서 비행하는 연장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참 연장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속초는 내면과 외면이 하나로 있는 것이다. 속초가 어둡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에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는, 한국어의 인명과 지명, 그리고 한국말들이 전 세계적으로 인용되고 사용되는 것에 속수무책인 것이다. 한국의 인명은, 지명은, 포르피리우스, 그러니까 오직 사복음서와 바울서신의 하나됨으로써의 연장인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빌레몬서, 요한일이삼서의 호흡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의 이름을 민중들이 아끼고 사랑하고, 혼자서 되뇌이는 것에, 당연히 왕은 속수무책인 것이다. 대신에, 악령의 주술처럼, 악으로 섬기고, 목숨을 핑계 무덤 삼고 하는 것에는, 결국에는 절대의 무덤, 성경으로의 문이 닫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구조의, 장난이 아니라, 역사와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이 성경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서양이 잃어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다. 대신에, 경험론적이고, 실험론적으로는 잃은 적이 많다. 아주 성경 자체가 그것의 두께로서 완벽하니, 쾰른 성당의 높이는 그것보다 더 높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중세는 기독교로의 비문명적 시기였다기 보다는, 아예 기독교도 없었던 시기가 아니었다 싶다. 사탄이 뜻하지 않게 완벽한 장악을 행하던 시기였고, 성채는 나중에 급하게 많이 지었던 것 같고, 구원은 철저하게 차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겨우 지중해 인근의 교회에서, 바울서신의 돼지 지나간 고깃국이나 먹던 사람들이 카톨릭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녀 사냥을 하고, 귀신 축출을 하니까, 전 유럽과 아랍권에까지 급격하게 팽창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사탄이, 저것들이 기만전술을 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여자들을 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하니까, 물량공세에 약한 악령이 자기들 지배의 틈을 열어주었던 것 같다. 멍청한 사제들이 르네상스와 더불어 겨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지만, 항상 우리들 눈에는 비용이 지나치다는 느낌 밖에 없는 것이다. 마녀들이 불에 타서, 지중해까지 걸어가고, 아프리카에서 아케나텐, 그러니까 다시 태어났다는 우스개소리를 누군가 해준다고 해도, 처음에는 혼또까? 해도, 한없이 이상하고, 모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 아무리 엄청난 자산과 비용을 탑처럼 쌓아놓고 있어도, 지식의 숱한 사탄적 원용에, 끄나풀 역할 밖에 하고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나처럼 열심으로 사는 사람조차, 기성편으로의 완벽한 철학 서적은 집필을 꿈꿀 수 조차 없다. 그 틈을 비집고, 드라마 프리스트는 유럽 논문 수 편을 압축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우리들의 이등박문이 드디어, 사탄은 늘 말만 번지르르한 이등에게만 상을 주고, 요직을 주고, 방문을 시키는데, 그와 같은 이등이 사탄 몰래, 스스로 노력하여, 안중근과 함께 일등이 되는, 만주의 꿈, 차라리 그와 같은 길이 빠른 것 같은, 나의 한국 천주교, 경이로운 체험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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