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라는 슬픈 무의식
우리가 작품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니까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작품을 한 뒤에, 평론을 듣고잡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 철학자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실상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다지 우리가 선망하는 완벽한 체계에 있지 않고, 다만 그들도 있던 것들의 변주에 지나지 않거나, 누군가의 말처럼 의지해 있거나 보충하는 것에 불과한데도, 우리의 완벽한 영혼은 그렇게 믿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도 그리스 철학을 하지 못한다는 원죄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하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참숯총각 들으면서도, 다음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거기서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래서 시인이고, 그래서 소설가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나처럼 그리스 철학까지도 할 것 같으면, 철학을 하지 무슨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할 것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만을 쓸 수 있어서, 소설만을 겨우 쓸 수 있어서, 영화만을 겨우 만들 수 있어서, 거기서 멈추고, 죽고, 사라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사도 바울이 요청한 완벽함에 나름 호응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마치 처음 공포물을 접한 사람처럼 되었다. 또한 참숯총각 공포물이 서양에도 많고, 한국에도 공동묘지가 많았지만, 그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던 정은채가, 좌로도 뛰어다니고, 우로도 뛰어다니고, 그랬던 이 드라마 밖에는 이제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사탄은 드라마를 통해서 말할 때가 많다. 영화나, 시인, 죽음, 칼날, 구토, 그런 것들로 말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은 그와 같은 작품의 평론에 깜짝깜짝 놀라기 때문이다. 어떻게 김소월이 그것을 예언하였는지 모른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의 스메르자코프가 예언하였던, 모든 것이 허용이 되는 세상이란, 그와 같은, 작품과 가루, 작품과 가루, 그렇게 마침내 피아노 음악만이 흐르는, 황량한 사막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루가 되는, 그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사랑을 하게 되어 있다. 사랑에는 그처럼 슬픈 앙드레 가뇽의 사가 같은 피아노 음악이 있다. 또랑또랑하고, 김영랑, 혹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 그와 같은 고려왕조의 친불정책 같은 마음 가짐이 있는 것이다.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남성적이고, 동시에 여성적인, 그런 것들을 다만 반불교적으로다가 분별을 잘 하여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한동안 기독교적 절대주의, 좀더 섬세하게 말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로서의 전적 타자성 같은 것을 좋아했던 이유는, 별 것 없는 그리스 철학이면서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슨 신학의 중심 줄기인양 찬양하고, 설교하고, 듣고, 설교 내내 앉아 있기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의 삶의 실상에서 그다지 분별지가 발달하지 못해서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분별심이 탐진치, 혹은 성불의 과정에서 떨쳐버러야 할 오욕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그것은 대학가의 언덕, 그리고 북한 방송국의 채널이 매우 일치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성경을 알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알고, 개인적인 수상을 알고, 세상 권력을 알고,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차단되고, 통용되고, 저급하게 관리되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계시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상대적이며, 상대적이라고 말해도 홀로 절대적이신 신적 경험을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묵언수행도 할 수 있고, 아주머니처럼 말을 많이 할 수 있고, 어린아이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들 수도 있으며, 무속인과도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분별할 수 없고, 남을 알지 못하며, 교회 건물 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보니까, 존재로서의 전적 타자성 같은 이상한 주문을 외우게 되는 것이다. 분별지가 아픔도 있지만, 기쁨도 있고, 참다운 것을 확보하고,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본지라고 불교가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멍청한 스님들이 법당에 앉아서 딱딱해졌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고, 토로하고,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듣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 없다. 이상한 삼발라 마술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그것의 효용이 있는 젊은 승려들이나 의지해서 사는 것이다. 드라마는 그것들로부터 사탄을 끌어다가, 자기에게 뒤집는 역할을 한다. 이 얼마나 슬픈가? 나는 정은채를 만나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랬던 탐진치와 오욕을 모두 그와 같은 마지막 회의 바닷가에서 잃어버릴 수 있었다. 님을 봐야, 그러니까 달을 봐야, 달을 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늘 이렇게 영화를 찍고, 영화인지 아닌지 하는 절체절명의 시공간에 빠져 있는데, 뽕을 어느 틈에 딸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가루가 된다. 원소. 삼국지에서의. 옛날에는 더스트 인더윈드라고 노골적인 노래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데, 찾으면 찾아지는 피아노 음악들이 많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보이고, 모래 바람이 부는 것이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내가 알겠느냐 하는 철공소 깡패 같은 노래를, 나중에 보니까 보기 좋고 반가운 우리말 노래 중에 하나라고 뽑았다고 한다. 얼마나 핍진하고, 너무 솔직하며,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 일생이 깡패에 가까운지. 사람들은 순열에 가깝고, 한 명 독립하지 못하고, 평생을 억눌리면서 살고, 그것을 의식했다가, 의식하지 못했다가, 의식했다가, 의식하지 못했다가 하니까,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하는 노랫말이 박력있고, 좋게만 들리는 것이다.
가루의 죽음이 비참한가? 아니면 살인사건의 연기가 비참한가?
HORROR! 이런 개새끼 같은 피라미드는 알고 있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늘 언제나, 관점은 차원과 같아서, 세상 사탄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
이제는 최영미, 영문학은 우리에게 반환되고, 국문학은 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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