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승리의 개가로서의 역설적인 귀접
우리가 손 더 게스트를 보면서 받는 체질은, 반응은, 신체적인 영향은 너무 쉽게 사람들이 악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후의 오분이다 버티고 버텨라, 군대에서 군가를 부를 때, 그것은 싸리나무 사역을 나가서, 엄청난 비탈길을 평상시 걸음의 속도로 오르고, 평지가 나타났으나 또다시 아직 먼 길이 헤아려질 때, 그때 부르는 군가이지, 행군 간에 군가한다, 군가는 최후의 오분, 그랬던 것 같다, 버티고 버텨라 하는 것이 신체적인 것이었지,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더욱 사탄이나 악마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좀비가 나타났으니, 세계 국가 어느 하나도 좀비의 편에 서는 곳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에 없을 뿐, 좀비의 편에 서는 국가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아 보인다. 사람은 재산으로도 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도 살기 때문이다. 재산가나 경제학자는 믿지 않겠지만, 형이상학이 돈이 분명 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육체와의 관계를 뜻한다. 돈이 정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거부하는 것은 아니나, 육체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그런 이상한 말은 삼척동자 신동엽도 거부할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숨가쁜 순환이, 믿음의 실체처럼 생기고, 우리가 기독교를 철학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의 믿음이 대단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비이성적인 것을 믿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의 화석을 품고 있는 것이다. 화석에 물을 주면, 금세 고대의 생물들이 되살아나지 않는가? 실제 화석으로는 불가능하나, 인간에게서는 그것이, 손 더 게스트에서처럼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고, 신기한 일인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형이상학의 이질적인 구석으로는, 그런 흐름으로는, 외국어를 이십사 개나 구사하는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형이상학 책을 읽고, 이상한 소설책을 읽고, 이상한 영화만을 보고, 이상하게 알바를 하면서, 이상한 책을 읽고, 이상한 철학에 탐닉하고, 그런 모임의 사람을 알고, 피라미드에 끼였다가, 크게 악마의 상처를 입고, 그렇다 보면, 그에게 문장 구사력만 없을 뿐이지, 그것의 순환과 시간들을 계산해보면, 충분히 아쿠타카와나 노벨문학상감이 되는 것이다. 귀신은 악마의 흔적인가? 아니면 인간의 흔적인가? 마태복음은 인간의 흔적이라는 지난한 노작이며, 정말이지 최후의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인 것이다. 악마는 세포로 되어 있고, 마침내 암세포가 인간 전체를 덮으려고 한다면, 이런 것은 의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세포, 세포에 준하는 정신과 표현, 그런 것들이 그 자리에 쏟아져 들어가면, 적어도 현상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럽을 점령하고, 그래서 점령군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가장 글을 못썼던 이가 키케로였던 듯, 아우렐리우스마저도 지금껏 괜찮다고 하는데, 성 어거스틴이나 나중의 금자탑은 아퀴나스가 될 것이나, 문명과 유적을 만드는 데도 그들 못지 않게 노력하였던 것이 엿보이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살인 사건은, 우연과 감각의 현상이다. 그들은 문명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감각을 지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한 적이 없다. 불쌍한 무소유 그 자체이며, 지식을 많이 가져도, 그것의 생활공간은 똑같이 낮은 데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악마의 세상에서 벽돌 쳐진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차마 부르지는 못하더라도, 기억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빠르겠는가?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보다, 가장 정확한 위치나, 전능, 인간의 기나긴 역사의 주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히려 후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기독교적 언어는, 도리어 그것의 그릇된 주소가, 사탄과 악마의 것에 가까울 때, 발성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전부의 고대 철학은, 현대가 아니라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운 사라와 같지만, 그것의 배경이 진토와도 같은 전쟁터이고, 형이상학적 인간실험의 형언할 길 없는 축제인 것이다. 사탄은 원래 깨지기 전에는 하나로 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산히 부서지고, 사탄이 쫓기게 되자, 그들의 은거지를 어디로 해야할 지 항상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사탄이 문명과 태양신을 받아들인 결과, 옛날 같지 않게, 공공연한 사탄의 제의가 아니라, 귀접의 현상과 은밀한 혈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진 것도, 물리적으로 대단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백퍼센트의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지, 처참하게 깨진 권력의 사탄과 같은 명령에는 더 이상 순종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탄에게 죽는 것이나, 그들과 싸우다 죽는 것이나, 심지어는 당하는 고통의 정도까지 같다는 것을, 피타고라스의 정리처럼 분명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안경을 쓰고 나면, 거의 모든 서양사의 내용들이 의미 깊게 파헤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손 더 게스트에서는, 분명 처음에는 박일도가 낯선 그냥 한국 이름으로나 등장하였었다. 그 드라마가 완성도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여기에 달려 있는데, 몇 편 남지 않는 기간 동안, 그와 같은 박일도가 매우 실체가 막강하고, 여주와 남주를 넘나들고, 여주는 슬픈 성적인 매력으로나 만들 수 있는 기울기를 가진 것임을, 어쩌면 매우 뒤늦게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 그것이 억지처럼 보인다 하는 것이 있고, 둘째, 둘째 아들처럼 보인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을 키운 적이 없지만, 둘째라고 해서 홀대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둘째가 굉장히 슬프고 매력적으로 보인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여자들은 얼마나 슬픈가? 아이들은 얼마든지 낳을 수 있으나, 그들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약속할 수 없으니 말이다. 미리암의 개가라는 것도, 어쩌면 그것의 무한정한 불가능성을 노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해야 하나, 이미 고대의 인체 공학자들이 점령하고 있고, 믿음만을 가지자니, 결국에는 어두움의 전경 밖에 형식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탄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바알의 편에 섰다가, 왜냐하면 구체적이라는 것은 분명 역사의 내용을 따서,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옷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영웅적인 인물들의 믿음이나 배가가 되는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사탄의 조작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권력의 기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피를 마시고 살아있는 육성으로 공간을 울리는 말씀이, 보이지 않는 기둥처럼 여간 매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알의 편을 들었다가, 그들을 심판하는 드라마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더러운 사탄 같은 종교권력자가 서는 것인가? 아니 밤낮 없이 성경을 읽는 사제들이 무슨 사탄이 될 수 있겠는가? 열성당원 같은 것은 될 수 있어도, 교조주의자들이나, 결혼을 안 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어도, 인체실험에 과도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순열에는 좀체 빠지지 않을 것이다.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바알의 편에도 서려고 하면, 솔로몬처럼 또한 자유주의적 영혼을 가져야 하는데, 자유주의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입맛도 버리고, 정신이 황폐해지는, 살아있는 공포 영화의 집정관이 되는 것 또한 여간해서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누군가 쓰고, 그것이 낭독이 되고, 동양의 언어로는 마태의 뜻이 마귀가 거대하다는 것만 겨우 가슴에 품고 있다가, 바알과 거의 모음 하나만 틀린 사람이 편지를 보내오면, 얼마나 들뜬 마음으로 그것을 펼쳐보았겠는가? 고린도전서가 무섭다고 해서, 후서에 보면, 고린도전서를 보면,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서신을 읽고, 제일 무섭다고 하는 고린도 전서를 읽고, 고대의 바알의 난잡한 귀신 축제를 열기도 했을 것이다. 사탄도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늘 죽는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틈만 나면 죽는다. 세계 방송이라는 것들은, 그것들의 숨가쁜 인과가 아닌, 손 더 게스트의 추적에 단 일도 호응하지 않는 씨블링들을 내보낸다. 손 더 게스트는 그것을 추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들의 말마따나, 공중의 인과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씨엔 드라마는 그것을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모기가 피를 빨아가면서 똥도 싸고 간다는데, 그 사실을 처음 알았지만, 그런 아주 미약한 측면의 위로를 주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새가 되어, 아스카 문명, 그것의 사탄의 원인을 추적하고 싶다. 할 수가 없는 것이, 피라미드처럼, 사람들의 육체가 수학적인 의미에서 그들과 아무런 차등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했던 말, 피라미드로 인신공양 행렬을 구성하면, 전체적인 이집트 문명이 대단히 기이하고, 사탄스럽기는 하지만, 때로는 농경 문화이고, 사랑스럽기도 하는 것이다. 몇 번이고 가다가, 전복되고, 몇 번이고 가다가, 배를 버리고 다른 배에 올라타고, 몇 번이고 이집트에 도착해서, 사탄의 사제의 목을 배고, 베드윈으로 정착하여 살았을 것이다. 정말 거대하고, 사탄 같지만,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바빌론 문명도 그렇다. 그렇다고 보니, 점차 사탄의 세력은, 그렇지 않아도 약해졌는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박멸되어 왔을 것이다. 다만 도려내어졌다기 보다는, 그것의 모나드가, 매우 약해지고, 축소되고, 마치 사라진 것처럼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선택하기에, 가장 자기와 가까운 것이 이런저런 환상적인 문건 하나 없는 이집트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모습만 환상적이고, 인간들을 학대하는, 그리스 문명은 분명 성경보다도 오래가는 것이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생각의 틀이 오래가면, 반드시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자기들 아가멤논들이 당할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택하고, 사도 바울이라는 우스운 사람을 택한 것이다. 사탄에게도 생명이 있다. 정말이지 천사의 시선으로 보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고, 결과적으로 슬프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국왕이 십자군 원정을 갔던 것도, 행여 사탄이 피라미드 이집트 문명을 뒤늦게라도 택할 것으로 유도하기 위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이 고통의 표현으로 밖에, 드디어 그것의 복잡한 현상학이 현상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 철학이나 신화를 택할 수도 있었는데, 사탄에게 안목이 있었는지, 혹은 생명이 있었는지, 기독교를 택하고, 중세를 보내고, 지금껏 그들의 제국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한 번 깨부수고, 점령을 했을 뿐, 구원을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손 더 게스트가 그렇게 마태복음을 닮았다. 그렇게 여주를 지원하고, 사랑하고, 다른 남주와도 엮어주려던 동료 형사가, 귀접이 되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여주와 질주하던 장면이 보는 이를 여간 안타깝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몸이 아파서, 대입 수학 능력 시험 중에 그만 두는, 그런 그림이고, 생의 비유인 것만 같았다. 사탄이 마태복음을 택하고, 바울을 택한 것은, 사탄이 마태복음의 깊은 메시지처럼, 인간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입장조차 아니었으니, 정말이지 궁창과 같았고, 그러니 작게는 한없는 고통이나, 넓게 보면 하나님의 존재와 승리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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