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인니는 피렌체 같은 것이었을까?

by 마음대로다 2018. 10. 1.

인니는 피렌체 같은 것이었을까? 






사람들은 제목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피렌체는 우리 편인가? 그렇게 말을 해야, 조금씩 감이 잡힐 것이다. 옛날에는 세계 전쟁이 흔한 패션 같은 것이었다. 패션의 선두 주자, 그렇다고 보면, 그것이 세계 전쟁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소룡이 쿵푸를 할 때도, 그것이 자세히 보면, 세계 전쟁의 빛깔을 띨 때, 우리는 상호적인 신성에 사로잡힐 수 있었고, 그것이 무국적적인 독재자를 상대로 승리할 때는, 그 불가능한 프로그레스, 얼른 총으로 이소룡을 쏘면 되지 하는 마음들이, 숱하게 접히고, 접히고, 접히면서, 이소룡이 용쟁호투에서 승리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린아이에게는 약국과 전파사가 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띤다. 왜나하면, 전파사에서는 티비가 나오고, 약국에서는 약을 팔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하지만, 약해진 사람을 그나마 영어식으로 끌고가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약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더욱 작아지고, 영화의 내용처럼 지원병이나 의무병이 오지 않아 죽는 것 같다. 어떻게 그와 같은 좌표가 그렇게도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계급이 있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아적인 정신이, 분열하여서, 외화되는 조건이 하루하루 날카롭게 차이가 생기는지, 그것이 슬픈 것이다. 내가 아버지면, 어린아이에게 클래식과 친숙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사놓고, 나도 듣지 않는 음악들을, 슬픈 눈을 한 아이가, 스스로 듣고, 그것의 연장인 것 같은 말과 행동 같은 것을 한다면,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소설의 진행은, 분명 청소보다도 귀한 것이다. 청소가 되지 않는 거리는 비참한 것이다. 아무런 소설도 하늘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폭격과 같은 소설이 있을 수 있다. 참 거기서부터는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알뜰신잡 이번 시즌에서는,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모양인데, 그래도 예의가 있어서, 마치 올림픽처럼, 그리스 아테네를 찾아간 것이 그렇게 보기가 좋고, 훌륭하였다. 드디어, 간섭하지 않아도, 내적으로 소명이 확립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얼마나 슬픈가? 옴브라 마이 푸. 아들과 딸들이 국제문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석가는 아니라는 소리이다. 교회에서 놀러가는데, 친구가 내게, 제임스 조이스는 아니더라도,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언급하는 것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의 이데아인 것인데, 남자 친구가 말하는 것이, 그 시절에 벌써 아깝기도 했었다. 우리가 교회에서 소풍을 가는데, 추상적인 평산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평지. 그것은 전라북도에 많은데, 반드시 비탈을 지난다. 그것은 만국 공통어이다. 비탈 중에 비탈은, 비탈리, 흑인 올페에 나왔던 것일 것이다. 슬픔은 인종이나 국가가 아니다. 우리가 좋은 작품으로 인해 죽음이 당겨진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으로 인해서, 이미 죽은 목숨인 것인데,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눈 앞의 비와 눈 앞의 지진을 보게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강소라와 결혼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섹스를 하면, 사람의 영혼과 색깔이 빠져나오게 된다. 영혼과 색깔은 생명을 말한다. 결국에는, 그림자는 겨우 붙어있기라도 하나, 이제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정석처럼, 선생님과, 학생들과 함께, 그나마 진행했었던 시간이, 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그것을 보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을 도리어 망가뜨리기도 한다. 목적에 이르러, 대게의 영화는 악마와 같고, 그렇지 않는 영화는, 일종의 타락 악마와 같은 것이다. 알뜰신잡에서 비중있게 언급했던, 아크로라는 말은, 타락 악마라는 소리이다. 우리들 전쟁 이후의 영화들이, 영화적인 기법이나, 자본, 그리고 서울의 배경들이, 사람들의 낭비를 막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는, 아크로가 많았던 것이다. 


의식은 어디에도 있다. 태풍이나 폭우 같은 것만 해도, 개구리들이 좋아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자연재해 중에서 지진이 가장 강력하게, 전형적인 악마처럼 사람들을 사로잡고, 지성과 감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있다. 태풍이나 폭우 같은 것만 해도, 어느 주인공을 택할 지 망설여지는 부더링 하이츠 같은 것이 있다. 히스클리프를 대게 남주로 여기는데, 그와 같은 격렬한 빛과 그림자가 다른 문학에서는 별로 많지 않다. 만일 내 딸이 대학에 들어가서, 부더링 하이츠를 읽고, 혹은 과목의 내용으로 배웠다고, 집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나는 그날 죽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하디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내 딸은 내 좋은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자기 졸업 논문이나, 유학을 가서도 박사 학위 논문에 써먹고, 내 앞에서는 입을 씼을 수 있다. 그런 모든 정경들이, 죽음과 어둠을 배경으로 하면, 다만 선명한 것들인 것이다.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도 그러하다. 아들이 아버지의 외도를 알고 고통스러워하는데, 세일즈맨의 아들이 바라보고 발견할 수 있는, 석가로서의 가능성, 그리고 하나님의 빛은, 거의 없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를 찾아야 하고, 그것은 거짐, 어렸을 때 유독 눈에 보이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은, 약국과 전파사의 풍경과 일치하는 것인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 여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날더러 아주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거기에 맞는 약이 있는가요? 카테고리가, 불쌍한 재생 타이어 같고, 어둠의 깊은 순열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수준인 것이다. 겨우 모든 것의 한국 전쟁과 같은 키를 갖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이 영국 문학을 모르고, 그나마 가장 높은 확률,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 철학을 모르고, 거기서부터는 리얼리즘, 독일 사람들이 그 수많은 철학자들을 모르는 것은 하이퍼리얼리즘, 그러니까 독일 병사들이 가슴에 품고 있었다던 하이페리온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나 불쌍한 청소년들이 있는가? 북한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볼링 공을 굴리면, 재밌다고 넘어지고, 서로 부딪히고,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항목들의 축제에 가장 먼저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늦어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들은, 재패니즈,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이런저런 주자의 하이츠들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신의 사국인 줄 알았던 조선에서, 삼일운동이 펼쳐졌을 때, 젊은 사람들, 계급 낮은 사람들, 지성인들의 희생을 접하고, 그와 같은 해석학적 통신을 통한, 정신의 나머지 국가에 대한 호령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에 있다는 것. 출구는 하나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인니는 그 모든 정치적이며, 전쟁적인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는 피렌체가 되어 있었다. 이름도 없고, 중국이 지나면, 인니는 더더욱 작은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탑을 좋아하고, 잘짓고 하니까, 그들도 천불천탑을 짓는. 그렇다고 보니까, 별다른 학문적인 분위기도 없이, 피렌체가 되어 있고, 적들의 카테고리에 포섭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모든 영화가 그랬다. 모든 학술 단체며, 국제 모임, 콘퍼런스, 드라마 같은 것들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