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리듬: 브이아이피(2017)를 보고
현대문학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상학이요, 다른 하나는 고고학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등 문제가 없다. 문제는 고고학인데, 거기서부터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전체를 상대하여야 한다. 물론 현상학을 할 때부터, 에드문트 훗설, 의식의 지향성을 드러내 보이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의 갈등이 김윤식과 평론가 황아무개의 차이가 될 것이다. 김윤식은 소설이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절대적 일반율도 개입하지 않는, 현상적 진단과, 그것의 지속 가능성을 응원하고, 지적하고, 최소한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에 평론의 작업을 국한하였었다. 그러니까 자세히 보면, 이것은 문학도 아닌 것이다. 김윤식이 먼저 그렇게 시작한 것 같았고, 도리어 거의 모든 것들이 문학이라고 하기 전에, 눈물 젖은 빵을 권하는, 권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뭐한 상태에 서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평론가는 창작을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도 후기인상주의인데, 김윤식은 더욱 그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들 비평사에 남긴 족적은 거대하다. 소설은 모래와 같고, 비평은 모래와 같다는 것. 어쩌면 처음부터 시작점이 달라야하지 않을까 하는, 무시무시한 초조함을 자극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황현산?을 비롯한 소장 비평가들의 회합이 있었다. 그들은 단일 인물로 여기기에 능력이 부족하고, 개성이 부족하며, 무엇보다도 문학성이 부족하였다. 기관에서 보고서를 쓰라고 하면, 회사의 규범이나 홍보물을 쓰라고 하면, 마치 화투의 밑장 빼기처럼, 처음에는 비평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보고서 쓰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반율이 발생하면, 그리고 마땅한 명사형이 발견이 되면, 너도나도 그것을 사용하는데 다들 무의식적이었다. 그들은 노고가 있었고, 맑고 확실한 것들만 문장으로 모아놓았는데, 일년이 지나면 갑자기 빛깔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현상을 서로가 쉬쉬하고, 모른 척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쉬쉬하고 그랬었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비평사에서도 공히 겪는 인간 현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스핑크스, 그것의 비밀과 같다 할 것이다. 처음에는 작품의 빛을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비평의 보다 정확한 빛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만 인간의 나이에 걸려, 누구도 어려서 비평의 천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나이가 들면 누구도 언어가 더이상 명징하지 않고, 의지가 선명해지지 않게 되니까, 만나는 친구들이나 선배들, 조직의 간부들이 그 정도의 말을 하는 것 같으면, 자기도 어느새 그 정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미스테리어스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에는 말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만다. 같은 것이라고는, 비평이라는 한 방에 있는 것 뿐인 것이다. 도시적 기회가 늘면 늘수록, 철학적 본질은 높아만 가는 것이다. 한갓된 비평가들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되는 것이다. 브이아이피라는 영화가, 어제 보았는데, 그와 같은 국과수, 그러니까 기가 막히고, 비참하며, 오래도록 가슴이 아리는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룸미러 뒤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은, 어려서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과 영락 없이 닮아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 것 같았다. 정말이지 김윤식이 현명한 것이, 죽어서 말이 없겠지만, 이와 같은 현상학의 현상추수적인 흐름들에 우리는 어떠한 항목도 갖다대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흐름으로 진행하면서, 소설과 같은 시간이면 욕을 먹을 것이기에, 그래도 훌륭한 일반 가능성의 말들을, 그리고 어휘들을, 자기에게만 가능한 작은 집 한 채들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미스테리하여서, 말 그대로, 영화의 에필로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와 같은 우리들의 운명이 반영된 것 같기도 하였다.
얼마나 슬픈가? 서울에서, 한강을 지나는 중에 비참함이라는 것은? 비평의 날개가, 누구에게는 펴지다가도, 누구에게는 그와 같은 단초마저도 자라지 못하고, 국회의사당의 지붕처럼, 대머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항상 귀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귀족주의를 표방하다가, 적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다가, 마음만 착했지, 이데올로기 측정기를 대보면, 천박하기 그지 없는 흔들림들이, 그래도 귀족주의를 해보려고 하면, 드라마가 가장 깨끗한 친구인데, 드라마가 가장 그나마 자기에게 힘을 주는 존재인데, 우리는 침묵하고 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그런 의미인 줄을 처음에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에게 아주 비상한 영향과 감동, 우리들의 예술대학 전부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것 같던, 드라마 W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브아이이피라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외국 사람들 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의 것은 작품이고, 나중의 것은 비평일 수 있겠는가? 비평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비평이 없다 보면, 한강에서 라면을 끓여먹지 않겠는가? 까탈스런 입맛의 외국 사람들도 한강을 저녁까지 돌다 보면, 반드시 먹게 된다는 그 라면이라는 것은, 어쩌면 드라마 더블유를 보고, 그리고 마땅한 비평을 세계 어디서고 볼 수가 없어서, 그러다가 마치 논개처럼 함께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듯한 문학적 동일시의 브아이이피에 놀라서 그렇게 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나중의 작품이 비평은 아니기 때문이다. 흥행은 무엇인가? 흥행은 비평인가? 흥행은 뜨겁고 맛있는 라면인 것이다. 드라마 도깨비도 그렇다. 아주 동아시아를 넘나들면서, 사람들 마음을 웃겼다 울렸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였었다. 그러나 민간차원의 댓글들 말고는, 마땅한 수사관들의 조서조차 작성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외국 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대게의 작품들은, 멋진 비평들이 항상 가득그득 하기 때문이다. 내 눈에 뭔가가, 그러니까 콩딱지, 그런 것이 씌운 것인지, 사도 바울의 눈물처럼,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은, 약간 뒷부분에서 싸가지가 없긴 했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남자로 변신하여서 범죄도시를 찍고 마는 것이다. 서울에서 친구와 범죄도시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만, 친구는 나의 예술가적 열정의 말로만 듣지, 마땅한 언급은 하지 않았었다. 도깨비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 죽을 죄와 같았던 것인가? 범죄도시 마지막 장면만이 가납이 되었었다. 얼마나 여자 주인공은 세상 떳떳하게 되어서, 주자에게 찾아오고 싶었던 것일까? 얼마나 가장 좋은 호텔에서 섹스하지는 못해도,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에서 접선하여서, 최소한, 정말이지 미니멈리스크, 섹스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동석이 그와 같은 순전한 마음을 참게 만드는 것이 좋았지, 그 이전 부분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인 것이다. 그렇게 도깨비도 비평이 없었다. 우리나라에 비평가는 거의 없고, 항상 비평은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안 들어갔는데 들어갔다고 하고, 지구는 들어갔다고 하고, 머리가 이상하게 빙빙 도는 것만 같고, 그렇게 비평은 오직 다음 작품으로만 사람들에게 떠넘겨지는 요플레 뚜껑에 묻은 내용물처럼 된 것이다. 관념으로만 근사하게, 모두가 죽을 존재인 것처럼, 다만 형식적인 사물관계가 운명인 것처럼 언급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비평의 전부라 하였기에, 그래서 그렇게 비평 연습을 하다가, 국문학도들은 그나마 몇 개 남아있던 문학적 영혼마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방법론을 취했던 김윤식과 다른 소장 비평가들의 외줄 노선이 눈에 띠는 것이다.
그렇게 비평을 말하는 소년과 소녀들이 있을까? 얼마나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전철들이 한강을 위로, 혹은 아래로 가로지르는가? 한번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진 여학생을 만난 적이 없어서. 나의 열정이 너무 거대해서, 여학생들이 보여준 것들은, 다른 평범한 남자들에 비하면 다소 엄청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애교스럽고, 작고, 이런저런 의류상가의 스몰들처럼만 보였던 것이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영화를 보면, 반드시 비평이 필요하나, 비평이 없다 보니, 그와 같은 비참과 고통이 고스란히, 요플레의 뚜껑에 묻은 내용물처럼 우리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부모님이 항상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하나, 딱 하나 있는 친구가 깡패와 같고, 영화에서 기가 막히게 보여주는 그림자처럼, 우리의 선악이 없는 체세포의 감각으로만 보면, 그 친구가 죽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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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현상학은 끝이 나고, 고고학만이 남았다. 숱한 이전 드라마의 다음 작품에 불과한 것의 흐름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주자학적 세계에서는. 주자가 유일한 언급자이나, 비평가이자, 철학자. 삶이 고단한 나머지, 작품도 보지 못할 수 있고, 너무 삶이 힘들어서 말조차 어려운 때가 많은 것이다. 세상에 하나 뿐인 주자를 정교하게 모함하는 영화를 찍었는데, 어디까지가 의미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설명해주지 않는, 아무도, 경찰도, 그런 것이다. 다만 더러운 대사가 천역덕스럽게 내비칠 때면, 저러다 주자에게 초능력으로 죽을라고, 그런 이상한 중간지대에 우리들의 뇌세포가, 마치 다른 방이 있는 것처럼, 뭉쳐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주자에게는 초능력이 없다. 주자에게는 훌륭한 삶과 훌륭한 언어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 삼손에게는 당나귀 턱뼈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항상 초능력과 관련을 맺게 되는데,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주자학인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주자학과, 중국의 주자학과, 백퍼센트 의미가 같다 할 것이다. 작품이 현상학에서 고고학으로 넘어가면, 굉장히 고통스러워진다.
우리가 호머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일리아드가 원주민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일리아드마저도 외지인의 작품이었는지 자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이 조선인의 작품이다고 확신만 할 수 있어도,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늘 내가 그 시절의 실정권자였던 것처럼 말하게 되는데, 가까운 지역만 관리하겠다고, 끊임없이 세계 제국주의에 간접적으로 우리들의 뜻을 표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틈만 나면 이상해지는 것이 집단무의식과 같아서, 염상섭에게서도 그렇고, 이광수에게서도 원주민을 향한, 같은 원주민이 아닌, 외지인의, 보이지 않는 고층빌딩의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전체가 나이브하여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것도, 비슷한 감정 선상, 옛부터의 역사 의식, 심지어는 도움을 주려고 하는, 한정 집단이긴 하지만, 선한 마음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이광수의 높은 문학을 보고, 느끼고, 연재와 함께 달리고 나자, 우리들 일본인들은 세상 누구에게도 향하지 못하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에는 카페가 있고, 섹스에는 임팩트가 있다. 미학이 단어가 없다 보면, 당연히 미학은 문학은 아니겠기에, 연장은 그저그런 도시적 삶이고, 당연히 온갖 섹스에만, 하와이에만 침공해 들어가려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 눈에는 보통의 훌륭한 민족 문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보편도 아니고, 민족도 아니며, 아이누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제 도래인도 아닌 그들은, 그와 같은 민족 문학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학은 끊임없이 무의식을 만들고, 무의식은 그와 같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무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브이아이피에는, 옛날 미국 미니시리즈 브이에 관한 언급도 엿보이는 것 같다.....
이병우, Epilogue 장화 홍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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