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개인적인 인격성과 문학적인 인격성

by 마음대로다 2019. 2. 25.

개인적인 인격성과 문학적인 인격성





드라마 바벨은 내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고,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개인적인 독재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학교는 공정하고, 왕정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프랑스 귀족처럼 보이고, 누군가는 이등박문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는 박완서를 싫어하는데, 그 맨 처음의 이유는 불쌍해서인 것이다. 내 어머니의 양장점 어디엔가, 아니면 내 누나의 서재엔가 박완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도 작은 도전의 언덕이 되었었다. 그런데 항상, 그것의 입구가 맞지 않았다. 거기서 앙드레 가뇽의 숱한 아름다운 음악들이 탄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에 수피아 여고라고 있는데, 수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적인 진행이, 우리 모두의 공통분모이면서도, 그러니까 이야기의 극적 진행과 별개로, 작중 화자의 세계관적인 모놀로그에 항상 우리가 매혹을 느끼듯이, 박완서는 어린 내게도 독해가 가능한 지평이 있었고, 벌써부터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오브젝트들을 진열하고 있기도 하였었다.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주자가 된 지금에서는, 뭐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싫은 것이 있으면 박완서가 연상이 되고, 박완서가 이등박문이 되어서, 숱한 조선의 독립투쟁사의 앞잡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안 읽으면 되는 것이고, 정확히 인용하면 되는 것이고, 전문가라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유는, 비평의 안목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비평의 대상을 불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는 때가 있다는 것은 공통적인 경험일 것이다. 도리어 그것을 재주로 삼는 사람이 있겠으나, 이현세의 유명한 만화 제목에 남벌이 있듯이, 재주의 남벌이 생명 에너지의 고갈로 연결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와 같은 길이 있고, 그와 같은 음악이 있으며, 그와 같은 서사시적 일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은 지금까지 개인적인 인격성을 기정사실로 놓고, 그곳으로 성경과 외국 고전 문학은 출입을 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문학은 숱한 학생운동의 스크럼처럼, 전경들이 막고 있고, 이런저런 운동으로 인해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서, 운동 중에 갑자기 대열을 이탈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인격성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우리가 부산 영도에 가면 그것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서쪽으로는 해양대학교, 고신대학교, 페리 선착장이 있지만, 동쪽으로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다가 일어날 수 있고,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온 것처럼 연기를 할 수가 있다. 서울을 일언이폐지할 수 없다면, 인천으로 고속으로 다녀오는 정신이 가장 훌륭할 것이다. 최근에는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이다. 개인적인 인격성이 고개를 들 때, 지금으로는 비행기를 타고 상해나 오사카, 멀게는 파리까지도 다녀올 수가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재미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모르는 일인 것이다. 마땅한 장편 소설을 갖지 못해서인 것이고, 그것을 장편 소설 그 자체에게 묻는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영화 청포도 어떤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그와 같은 단백함과 단박함이었다. 서울에 있다가, 경주로 갔다. 내가 우리나라 정신사에 미친 영향은 음으로 양으로, 미세먼지나 무의식적으로 대단한 것도 같다. 그렇게 슬프다. 천년고도, 그와 같은 금빛 케츠프레이즈에 간다는 것은. 박완서와 박완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화의 시대를 만나, 그들의 문체를 달성할 확률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고 나면, 저녁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직관했다. 그 어마어마한 스페이스. 화성의 논과 밭 사이로, 기적처럼 솟아있던 한신대학교, 그 앞에 같은 논과 밭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러한 자취방들 사이에서, 나는 기숙사에 있고, 친구들은 거기에 많이 사는, 그와 같은 음악적 진행이 어마어마한 보이지 않는 탑과 같을 때, 얼마나 공부는 사소한 노동의 규제에도 그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것일까? 운동을 하고, 성가 연습을 하고, 그래도 공부는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만 하다 보면, 정히 사람이 힘도 없고, 이상해지는 것이다. 운동을 하고, 합창단 연습은 그만 두기로 하고, 그때 성가대 선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래도 다시 보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계속 나를 보던 것이 생각이 난다. 얘가 무슨 공부를 하길래? 하는 것도 있었고, 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일주일에 세 시간 연습하고, 따로 한번 공연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것이었을까 생각할 수가 있다. 정말이지 박완서를 읽으면, 그것의 한계 내에서는 모르나, 지경 바깥에서는 폭력적인 돼지가 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본질적인 현상이자, 운명인 것일까? 내가 좋아하던 여학생이 어느 때는 매우 돼지처럼 보이는 것이 항상 고통스러웠었다. 지금에야 그 두 항목을 손에 들어 비교하는 것이지, 그때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의 상대성이라는 것이, 그 시절의 나의 불쌍하지만 매우 견고하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진지한 영혼의 초상을 비춰주는 듯 하다. 뭐가 피곤해? 성가 연습하는 것이 피곤해? 예. 그냥 연습하고, 그러면 되는데, 한 번 연습하고 나면, 그날은 기숙사에서 그냥 잠이 들어야 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냥 잠이 들면 되지 않나? 그렇지 않았다. 반드시 공부를 해야 했다. 세상은 박완서도 높았고, 그것을 대충 공부하는 만족으로다가, 지평 다른 곳에서는 돼지처럼 모여사는 것이 내게는 보였던 것이다.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내가 군대에 가서, 강원도 높은 곳에서 비를 맞는 것이, 다른 행성에서 관측하는 기상 현상과 달랐던 것은, 슬픔이 형상과 밀도, 좌표와 눈금 사이에서, 거의 일치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세련되려 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세련된 것은 다른 것이다. 얼마나 마음이 울적했는지 모른다. 당장에 여자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신체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여자 친구가 없으면 머리가 아팠고, 진심이 오고가는 말상대가 없으면, 대학 공부에 장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지 못하면 생기는 금단증세도 같은 좌표와 눈금인 것이다. 그냥 뭉뚱그려 말하게 되었는데, 그 여자친구는 내 마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방의 넓은 공간에, 한쪽 측면에서, 마땅히 필요한 사람에게 조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와 같은 약의 조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약했다가, 강했다가, 평범했다가, 강했다가 하는 리듬으로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개인적인 인격성이 문학적인 인격성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그와 같은 것을 부단히 노력했었다. 가뇽의 la fin du jour. 일단 카메라를 갖고 있으면 유리했다. 지금 우리의 기분으로서는, 마치 철학적 진단이나 통찰처럼, 문학적인 인격성이 선험적으로 있고, 개인적인 인격성이 세상 모든 관계와 경험을 연결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격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판에, 다만 개인적인 인격성의 한계를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들 옛 영화들이 그랬다. 다른 외국 영화들이 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들 안 보지 않는가? 스토리가, 그때는 전쟁 이후라서 그랬지, 지금 보면 다들 다만 내 입 속의 마른 잎만 같은 것이다. 내 아들과 딸들이 사회적 적합성의, 진짜 사나이, 혹은 정글의 법칙 같은 곳에 있다가, 개인적인 인격으로서의 음악을 들을 때 얼마나 눈물 짓겠는가? 박완서류의 부모들, 그와 같은 결계에 있다가, 조금은 백제와 같은 계단에 오르고, 자기만의 방에 돌아오는 기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렇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서, 나에 관한 찬송이 많다. 우리들 성경과 찬송이, 찬송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다 연결될 수 있고, 반복될 수 있는 길이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의 것도 그런 것이다. 숱한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이, 지금은 나의 손에서 떠난 세 드라마, 별책부록, 왕이 된 남자, 그리고 바벨. 바벨이 그래서, 그것의 형식성과 시간성 때문에 우위에 있다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장르적인 다시 보기는 다시 보기일 뿐, 때로는 문학적인 인격이라는 것은 허구이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뭘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옛날에 신작로를 걸을 때, 그것은 어쩌면 신작을 위한 혹은 작가를 향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어째서 평범한, 가난한, 어리고 약한 그 많은 사람들이 신작로를 걸었던 것일까? 그것은 신작로의 끝에는 좋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