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신비로운 시간을 살고 있다.
서울 시향의 베토벤 황제 이악장을 들으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민주화라는 풀뿌리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여유가 별로 없었다. 유인영도 그렇고, 이유영도 그렇다. 심은하만 해도 그렇다. 에스에프 공포 드라마 엠과, 마지막 승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들은 내가 보지 않아서, 영화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사라진 것 같은 것이다. 텔미섬딩은 이유 없이 무섭고, 미술관 옆 동물원은 약간 덜 만들어진 드라마 같다. 우리 어린 학생들이 한창 성장기의 나이에, 공부를 함에 있어, 그들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사회적 반영과 같은 문학적 형이상학, 그와 같은 작품을 만나기라는 것이 하늘의 김일성 별과 같은 따기가 어려운 것이다. 동방불패가, 나머지의 것은 이제는, 나와 같은, 마니아나, 홀로그램, 홀로 늙어가는 노총각과 같은 사람에게는 잊혀진 바가 되었으나, 처음의 장면이 서둘러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 같은, 별을 따다가, 나에게 주는 그런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불완전 인칭 대명사로서,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 준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 학생 때에 폭력에 예민한지, 아니면 이념과 우상에 예민한지, 우리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여기서 우리도, 불완전 인칭 대명사로서, 정확히 어떠한 코뮤니티를 가리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 앞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게임을 하다 보면, 친박 비박 할 때의 게엄령, 그런 것을 많이 하다보면, 공부를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부모로서는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교 일이등 하는 아이가, 게임하기를 좋아하면, 부모로서는 악어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악어의 새끼가 공부를 잘하면, 악어는 기쁨을 느끼겠으나, 보통 우리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때, 암하레츠, 그와 같은 사람으로서는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게임이 스스로를 변형시켜서, 좀비에 대한 철학을 만들고, 세상을 완벽하게 구성하고, 영화로부터, 혹은 간츠 0로부터, 칸초 혹은 제로니제이션, 지원 사격을 받으면, 부족한 생각의 부분이나, 양분, 혹은 전체의 프레임 같은 것까지도 얻어낼 수 있을 것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수레바퀴 아래서,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 우리들의 음반을 기억할 때, 타이틀 송과 나머지 음악들의 현격한 차이를 느끼고 싫어했던 기억, 나머지 음악들도 마지못해 계속 듣고 있으면 나름 좋아졌던, 어떤 나무 창틀, 그때도 이미 우리는 부유했지만 심리적인 옛 기억, 그러다가 시험에 붙고, 혹은 시험에 떨어지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클래식 음악의 이악장의 발걸음과 더불어,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알면, 그와 같은 게임 산업과 같은, 산업에 산업을 낳고, 함정에 함정을 낳는 일은 분명 마땅치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사탄과의 관련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제한된 경험의 세계 내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할 때는, 그 모든 것의, 그와 같은 일련의 작업들이 모두, 엑소시즘과 정확히 같았고, 하나의 틀린 것이 없었으며, 모든 부분의 영양소가 완벽했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팝송이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높이에 있을 수 있었고, 미국 영화가 그들 팝송과 연관이 되어, 죠스 같은 것까지도 허용되고, 생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순전한 생각이, 주택가가, 혹은 아파트 촌이, 신승훈과 이승환, 공일오비, 다른 싱어송라이터만 하더라도, 충분히 우리들의 미래를 정신현상학에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듣지만, 그와 같은 시스템 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세상 좋은 것들로만, 볼리비아의 우유니로만, 존재와 시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맹점이 있다. 우리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하나는 프로야구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다지 자기 반성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철학은 모든 것의 원인을 묻고 생각하고, 그것으로써 있는 것을 더욱 있게끔 하는 것을 기본 운동으로 한다. 그러나 한용운 같은 것이, 심적으로는 우리들의 독립 생명적인 투쟁을 했다고 해도, 하나는 그의 시가 매우 늘어난 팬티처럼 헐겁고, 다른 하나는 그런 그가 남들보다 운동에 매진한 이유를 우리가 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들의 독립 운동과 민주화 투쟁이 한용운을 다만 한 사람으로써 아는 것이, 그래서 더욱 다행인 것이다. 그렇다면 엑소시즘이 없는 소박한 생각이라는 것은, 다정하고, 같은 다람쥐 같은 표현이지만, 정다운, 그와 같은 세계상과 풍속은 어째서 위험한 것인가? 위험하다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일단 미국의 문학적 역사에서 한 시간 정도 쉬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쉬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금 사탄과 싸워야 한다. 영화가 몇 가지의 완벽한 요소를 제하고 난 다음에는, 매우 한용운의 팬티처럼 헐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가 과거 인물이고, 상대적인 민중들에 비해 문학적 능력이 있고, 그에 대한 결과물이 있다고 해서, 국문학자들은 그들의, 한용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니콘을 잘라내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그들의 문학 세계와의 결혼이, 결혼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용운은 한용운대로 구제하고, 구제의류, 적어도 헤겔의 시대정신을, 섬진강의 모래사장에서 그려낼 수 있으려면, 비상한 여러 방법들이 강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문학과의 호빗들을 보면, 마치 반지의 제왕처럼,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에도, 이 나라의 관념적인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샘성, 엘쥐, 독립해 있어도, 관념적으로는 매우 철저히 비독립 국가이기 때문이다. 관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의 철제 혹은 군사력과의 관련성, 혹은 비관련성에 대한 문제제기 조차, 세상 살면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젠젠 모르고 죽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포켓볼을 하면서, 여학생들과 친교를 할 때, 그들은 늘 알 수 없는 원인을 갖고, 사람들을 하나씩 집어 넣고, 독립 영화를 찍는 것인지 모른다. 어느새 우리들의 댓글들은 권력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자연적인 다수라면, 징그러운 종유석이나 석순 같고, 그들이 조작된 첩자들이라면 냄새나는 종유석이나 석순 같다. 우리들의 종유석이나 석순은 아름답지만, 그들의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항상, 공이 핀볼처럼 튕겨서, 일본의 새로운 연호, 제로니제이션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뻔히 보면서, 날이면 날마다 댓글들을 달면서, 그것의 공중적인, 중간지역적인 담론에 대한 열기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들끼리, 다음 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냐는 물음이 전혀 없다. 댓글이라도 단다는, 그와 같은 딘딘, 그들끼리의 축하의 물결에 항상 잠겨 있는 것이다. 민주화 투쟁이 사라지고, 그와 같은 전 세계적인 엑소시즘이 사라지고, 우리들은 지금 사탄을 직접 상대하고 있다. 사탄이 얼마나 풀뿌리 민주주의에까지 장악력이 빼어난지, 노자와 도덕경 할 때처럼,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시군면 단위의 설정에까지, 함께 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먼저 그들끼리의 기호나 암호가 있었는지, 사람들을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궁금해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젊어서는,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고, 나이가 들어서는 죽음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사실 그런 것이 미치도록 궁금하지는 않다. 다만 화성에 가 있는 큐리오시티, 딱 그 정도는 과일 샐러드에 오이까지 넣어 먹고 싶은 것 뿐인 것이다.
미국의 대학은 영화와 관련이 있다. 미국의 모든 대학 논문은 미국의 팝송들보다 못한 것들이다. 우리가 미국인을 좋아하는 것은, 일본 사람들마저도, 그들의 과거를 깨끗하게 잊고, 블렉 레인,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팝송 때문이었다. 여자 그룹 스피드도, 그들의 바디엔 소울을 부를 때는, 완벽하게, 그들이 선망하는 대지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리고 하나만의 현상이 되지 못했다. 아무로 나미에도, 그것의 슬픈 빠삐용 같은 나카시마 미카도, 미국 팝송이 갖는 문학 현상의 절정에, 혹은 그것의 다음 날의 풍경에 익숙한, 불교적인 따라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남녀관계에서는, 백두산 함몰된다고 만다는 것은 철저히 우리들 모두에게는 탑 쒸크릿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대단히 지적인 노력과 준비에 의해 구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기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십분 가량 되는 장면이, 그들은 몇 달을 준비한 것이고, 우리들에게는 한 시간 조금 넘는 영화가, 그것이 묘사한 시간은 십년 일 때도, 백년 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밥을 영화 보는 내내 먹지 않는데, 그들은 천일의 앤처럼, 백년의 전쟁처럼, 먹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의 반려동물이, 우리들이 화재가 났을 때,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는, 우리들의 옛 민담에서의 기억과 믿음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사탄은 그와 같은 모순적인 스타일에도 숨어 있고, 여자들의 해방에도 지속적으로 숨어 있다. 여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들의 해방은 그래서 독특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남자도 남자이고, 남자도 사람이라는 독특함에 하나 더한 부가 현상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유물론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의 만족이 숱한 유물들로써 발생한다는 것 때문이다. 우리가 땅을 파다가, 백제 시대의 플레이스테이션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세상은 게임 같고, 세상은 브이알 같고 하지 않겠는가? 제로니제이션? 그러나 남자가, 오토코가 책을 한 권 방학 기간에 읽고, 저 먼 지역의 도시에 유학을 갖다 오고, 외국으로 업무를 떠나게 되면, 우리들의 정신이 그와 같은 독일 경험론의 결과일 수는 없다고, 남자는 여자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세상을 향한 마땅한 출구를 알고 있고, 그것에 관해 사람들은 영원히 어리석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거의 모든 철학사, 미술사, 문학사, 정치사, 경제사, 전쟁사, 한국의 민주화 역사가 구성되어 온 것이다. 황정민이 신세계에서, 몰랐어? 세상은 원래 그래 하는 표정은, 우리들 영화 관계자들만이 아니라, 사탄이 보기에도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남녀 러브스토리가 불가능한 것은, 하드고어 느와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비난, 욕설, 저주, 우물에 독뿌리기, 칼질, 총질, 폭탄 같은 것들이, 처음에는 사랑했고, 나중에는 결혼했는, 그런 사람에게 똑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쟁 영화가 그것을 철저히 가두고 있을 때는, 우리는 러브스토리만 찍어도 되었던 것이다. 앤디 윌리엄즈. 그러나 미국 영화는 카니발의 아침에서 모두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의 미국 영화는, 에이특공대 영화 처음 장면의 춤추는 헬기 씬처럼, 그와 같은 아드레날린이 전북 현대, 그러니까 완벽한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흑인 올페가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여자에게 순정이 없는 것이, 그것의 도형적인 의미에서, 사탄 같은, 자기 가장 가까운 남자의 천국으로의 초대에도 매우 강력한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절체절명의 형상이, 신기하게도 간츠 오, 그러니까 제로니제이션에 매우 잘 이상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도 영화가 이상하다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이상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어째서 미국 영화를 자기들의 생명처럼 좋아한 것인가? 나도 물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뜨고, 올드보이의 한 장면처럼, 음색처럼, 자, 우리가 살던 옛날, 얼마나 제한된 사람들인지, 사탄이 전쟁과 지옥에 아직 철저히 한정되어 있던 세상을 맞이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의 피아노 이악장은 그렇게 우리들 인간을, 이보다 더 불쌍하고, 서글플 수가 없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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