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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관념은 빌리브. 죄인 오스틴은 셰익스피어의 죽음을 죽지도 못하는 한계상황

by 마음대로다 2013. 4. 16.

관념은 빌리브. 죄인 오스틴은 셰익스피어의 죽음을 죽지도 못하는 한계상황

 

 

 

 

 

 

 

 

이영애가 나왔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결혼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투피스를 입었을 때가 있었다. 아남네시스가 무엇이었을까? 너무 많이 사용한다 타박할 것이 아니라,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여배우는 눈이 두 개이다. 사람마다 미소를 짓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전화를 걸려면, 한 사람 정도는 지나쳐야 한다. 많으면 세 사람 정도. 보통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인지도 없음으로 인해서 시간이 걸리지만, 여배우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영화가 나오는 것을 보면, 영화 찍는 자리에서는 빠짐 없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영애는 따라쟁이이다. 올드보이가 있으니까 금자씨를 찍고, 다모가 있거나 오래 전에는 허준이 있으니까 대장금을 찍은 것이다. 나는 이영애와 결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영애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이영애는 나의 그림자들을 따라 다녔고, 그라마톨로지에 잠식되고 말았다. 영화가 우유빛깔 같은가? 아니면 같은 말을 반복하더라도, 간결한, 하나님의 십자가 같은 문자가 우유빛깔 같은가? 따라쟁이 이영애를 보고는, 제작자들이 콜렉티브 컨셔스니스를 갖게 되었다. 어떻게든 맺어보려고 했던 것이,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었나 한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대장금만 세계적인 드라마가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영애가 수녀적인 종결점도 있어서이다. 내가 장군적인 종결점이 있어서, 만남에 동기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이영애도 자기가 아이가 아니라는 것으로다가 주장하려는 뭔가가 있었다. 이영애가 가장 나와 가까웠다. 황현정 김주하 박지윤은 실망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다만 가장 예뻐서 가까운 것인가 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따라쟁이 같은 필모그라피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는 나를 동해 바다로 이끌었다. 사랑은 누군가를 죽일 수가 있고, 그것은 검날에 비추이는 세상의 풍경 같은 것이다. 나는 영화를 제작하고, 대표작 같은 것으로,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 같이 보인다. 글은 그와 같은 그래비티가 있다. 대신에 이영애는 다른 에세이집을 발표하던 가수나 배우들처럼, 평이한 책을 낸 것이 전부이다. 내가 한신대를 가니까, 인샬라를 찍었다. 내가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을 간다고 깝죽대니까, 드라마 초대를 찍었다. 나는 이영애와 결혼할 줄 알았다. 영문학은 수많은 들러리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아포칼립틱한 카툰이 분명 노팅힐 같은 것이다. 결혼을 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음과 소녀처럼, 그녀는 결혼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장군과 수녀의 배수진에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나의 우주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파리 같다.

 

 

어째서 제인 오스틴은 자기를 죄인 오스틴이라고 반쯤 한국어로 이름 붙였던 것일까? 그녀의 부모님은. 셰익스피어는 생명 연장의 선민적 시간 속에서, 영국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과연 셰익스피어를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던, 지리적 인간들이 있었을까? 문자로 보면, 셰익스피어는 시대 구분이 되며, 후대에 걸쳐 소설이 탄생하였다. 그것은 내가 전공한 것이다. 수많은 소설들은 콜렉티브 컨셔스니스를 갖는다. 우리가 이광수의 무정을 생각하지 않고, 염상섭의 삼대를 반성할 수 없듯이. 사람들은 기가 막힌 조나단 스위프트가, 심오하고 아름다운 드포우가, 나중으로 가면 에밀리 브론테가 낫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고전주의라고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을 스위프트나 드포우의 것도 너무 짧고, 누군가에 의해서 워즈워드나 코울리지 키츠의 것까지도 단아하고 담백하고 정치한 것들의 아성으로 짓고, 나머지들을 바깥으로 아무렇게나 내모는 것으로도 영문학사가 정리가 되는 것을 디스커버리할 수가 있다. 브론테던지 말던지, 샬롯이던지 아니던지, 마리 셀리던지 다른 셀리던지, 이름부터가 삭막하기 그지 없는 버지니아 울프던지, 여자들은 여자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돌보고, 아주 독특한 쇼비니즘을 갖게 되고 유지하게 된다.

 

 

제인 오스틴은 따라쟁이이다.

 

 

 

만일 보다 깊은 더블 쉐도우의 디멘젼 속에서, 제인 오스틴의 글이 성 바깥의 여자들에게 선사한 어떤 남자의 비책이었다고 한다면, 보다 폭풍 같은 눈물을 자극하는 것이리라.

 

 

과학은 따로 가며, 디에이치 로렌스는 아주 어떻게 보면 엠에스지 같은 느낌도 있다.

 

 

디에이치 로렌스도 셰익스피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것의 담양. 그가 영국인인지 모르나, 그를 위해 바로 죽을 수 있는 약자들이 무슨 글을 썼겠는가? 디에치 로렌스도 그때문에 문장이 파편화되고, 클로바처럼 되어 군락을 이루고 네 잎이 있는지나 관심 갖는 것이 되었는데, 문법책이나 법률책을 들고 이웃집을 방문하는 제인 오스틴의 글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예 읽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다. 부모님이 못읽게 했다면 그럴 수 있다. 읽었어도, 셰익스피어를 북한의 김정은 정도로만 여기면 그럴 수 있다.

 

 

어떠한 아남네시스도 작동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으로 죽고, 자기를 성결하게 하고, 천사들과 대화하고, 다시금 살아서 생명의 법처럼 웃고 떠든다. 내가 싫어하는 템페스트. 반면에 죄인 오스틴은 죽지 않으며,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뿌띠 부르조아 같다. 소녀들을 회합하고, 소설의 전부라는 신화를 조성한다. 문학적으로 셰익스피어와 결혼하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이상한 남자와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