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위적 멜로디의 전통과 한국의 fx의 신보 일렉트릭 샥. 한신대학원에서
기계음이라는 것은 친숙한 것이다. 가난한 자취방에서, 새벽까지 울리는 냉장고 소리는, 귀속성, 편의성, 시원한 쥬스성 등을 갖고 있다. 에어컨은 없어도, 에어컨에 대한 비정신적인 의지가 팽배할 수록, 그것이 없어도 우리는 지낼 수 있다는 자기 능력의 가능성을 점치고 싶다. 그러나 냉장고는, 그것은 없으면 안된다고 하는, 경제적인 최소 요건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앵겔 계수인지. 한계 효용인지. 일본이 기계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본은 기계도 있고, 갓파도 있고, 원령공주도 있다. 마쯔리도 있고, 청수사도 있고, 스모도 있다. 다시금 기계도 있고, 아주 예의 범절이 깎듯한 택시도 있다. 기계는 돈과 결부되어 있다. 냉장고는 마치, 민중들에게는, 돈을 공중에 태우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서 사용하는 것 같지만, 다른 것들은 대부분, 시마과장이 일하는 가전제품 회사에서 서로 다시 깎듯한 예절과 이야기 나눔과 돈을 지불하는 과정을 거쳐서, 작은 집에, 더 작은 집에 들여온 것들이다. 기계음은, 일본어와도 비슷하다. 여기서부터는 학자가 하나도 없다.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관심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단순한 것으로 치부되게 되어 있다. 어떤 주장이 가능하려면, 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이게 맞는지 안맞는지 도통 알 수가 없고, 만일 그 미약한 우연성을 근거로, 콘팅젠시, 일반적인 내용을 상상한다는 것은, 군대적 규율 속에 몸을 담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脫者化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럴 듯한 마계에 관한 정보와 지식들이 사회적 정식 가치와 효용으로 교환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언어학적 관심, 필연적인, 우연적인 미학 등을 작은 화분에 담고 싶은 마음이 우선순위에서 밀쳐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금, 네온은 사인을 보내고, 기계음은 그것이 미학적인지, 기호적인지, 아니면 논리적 이전 상태인지 모르는 의식의 입구에 꾸준하게 전진해 들어온다. 우리의 정신이, 공각기동대나, 중경삼림에 보다 미치는 것은, 그것이 가가호호 단정하고, 다다에마, 오까에리 하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매력 없는, 어쩔 수 없이, 클리쉐에 조금은 지쳐 있거나 질려 있기 때문이다. 네온은 들어오다 말다 한다. 띡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타격 소리가 아니지만, 숱하게 계측하면 타격이겠지만, 유리관을 흐르는 것들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기체인가? 아니면, 이치인가? 여기서 이치는, 이름이나 형식이 아니라, 가장 기체에 근접한 것으로서의 이치를 뜻한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아사쿠사 거리에 넘쳐 있다. 낮에는 벗꽃에 취하고, 저녁에는 네온에 취한다. 이 말은 일본 시인, 사무라 켄지가 쓰려다가 만 것이다. 그것의 격정은, 공각기동대의 탈 일본성, 일본 유사성으로서의 홍콩에 미쳐 있다. 그것의 일편은 유화 같기도 하고, 수채화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는 일본의 소년소녀들의 전통적인 합창을, 일본적인 소외의 근거인, 기계 문명의 소음들과 어떻게든 매치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의 시도는 형식적으로 보면 단순하고, 내용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영화를 교육적인 애니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본에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제외하면? 오시이 마모루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화인지, 수채화인지 모르는 그것의 일편은, 일편의 네온은, 흐르는 물은, 심오하고, 자기부터가 아무런 대책(다이혼)이 없는 것에 대한 회환이 참으로/표현되는 지 모르는 의식의 통로로써, 지대하다.
한국이 재산이 많다. 네온에 대한 관심을 갖기에는 정치적으로도 두껍고, 망언이 일단 별로 없고, 나온다고 하면 자국에서부터 칼침을 받으며, 일본해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동해와 일본해의 병기를 주장할 정도로, 태생이 그런지 마음 결이 두텁다. 일본은 촉새 같고, 붙들고 있어야 하며, 일단의 물을 담아서 보다 담가야 기초적인 신앙심이 생긴다. 한국은, 다만 접시에 물을 담아 머리를 어루만지기만 해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작가들은 자기들의 재산의 순서에 따라 글을 쓰고,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너의 재산을 하늘 나라에 두라 했던 것의 진위가 그것일 것이다. 그 말을 탁구 치지 못하면, 그것이 또한 일본의 전형인데, 문학적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나중에라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은 부정적인 측면이긴 하나, 교회는 축재가 심하고, 목사의 월급은 교회의 크기 만큼은 된다. 교회는 매우, 사회적이고, 다시 한 번 부정적인 측면일지라도, 반면에 일본은 사회성의 투명성이 한국의 것들보다 세련되고 범주적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잣때를 갖다대면, 신지라레, 쉬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되는 것이다. 하츠시바 회사는, 사원들의 훈련을 엄격하게 시킨다. 그렇게만도 하루하루 연결된다면, 분명, 그것은 실제이다. 그것의 실체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적 욕구는, 마치 일본의 전부 재산을 바쳐 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인간은 참으로 거대하고, 엉뚱하다. 문제는 참 예술이 되는 것에, 모든 경제성과 비경제성, 그것의 결합으로서의 비판성, 혹은 화용성이 집결되는 것이다. 일본은 범주적으로, 육체와 비논리적인 것이 발달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어째서인가? 안육체. 그러니까 정신이 되고 싶은 오하이오요. 참논리를 찾고 싶은 주자학의 개별적 에이전트들이 거리마다 차고 넘친다는 소리가 아닌가? 내용은 눈이 없고, 형식은 재산이 없다. 뭔 말인지 실감이. 이제는. 된다. 하지만 아무도 맨 손으로 돌을 깰 순 없다......
일레트릭 샥.......
*사진은 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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