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는 경기도에 있는 것인가? 시흥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친한 친구가 다부지고 아는 것이 많으면 경기도에 사는 것도 재미가 있다. 경기는 북부, 남부, 동부, 서부 다 있다. 내가 주로 살았던 곳은 경기 남부. 그래서 경기 동부나, 서부, 행여 북부를 지날 때가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그윽하고, 동두천 여상고 유명한 고적대스러웠다. 광주에서 나는 동두천 하면, 고적대 지휘봉이 하늘 높이 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이 떠올랐다. 의정부가 의왕시와 퓨전이 되었다가, 그러니 의왕시를 지날 때면 의정부를 지나는 것 같았고, 의병장 임꺽정, 동두천이 함께 떠오르면, 나는 애타게 고적대 그 아름다운 지휘봉을 찾았다. 그것은 진실이다. 나는 지금 매우 진지하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가 광주에 가면, 다시금 동두천은 그렇게 떠올랐다. 물론, 내가 조금씩 오래 사는 곳의 사진들이 그 위에 보다 분명하게 덮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랑의 인사이고, 지금은 베토벤의 로망스이다. 나는 점점 경기 남부의 전문가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조치원에서부터이다. 나의 기차 타기는 어쩌면 이등 박문 같았다. 광주에서부터, 정읍과 백양사, 익산이나 대전을 지날 때, 그 모든 단어와 사람들은 모두 내게 체크가 되었었다. 그리고 천안부터 나는 호두과자를 맛보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주로, 기숙사와 학생회관의 밥을 먹는다. 약간 부르조아해지면, 학교 인근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연결은 무엇인가? 연결은 여럿 같은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이메이저와 비슷하다. 이츠마이메이저. 시흥에서...... 기숙사에서 내린 눈처럼 거대한 밥을, 맛있는 밥을, 아침은 가격이 같으나, 먹는 사람이 몇 명 없어서, 반찬이 헌법의 기본권 같았는데, 그래도, 그것이 그렇게도 맛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대전을 지나면서부터 맛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였다. 아주 가끔 먹는, 맥주와 통닭집을 지나쳤고, 혼자서 기숙사에 내려가면, 나는 그때도 말했고, 늘 말하는 것이지만, 학교가 내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속성은 일반 학생과 같았다.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여자가 많았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나의 노동과 종교의 결과였다. 계층은 밥을 어떤 자리에서 아주 명랑하고 힘있게 먹어야 계급과 구분이 되는가? 계급은 삶의 일반적인 범주의 정리 속에서 지배적인 성격이 가미된 것이고, 계층은 그것과 엇비슷하지만 문화적이고, 수평적인 구분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맹아적인 측면에서 벌써 마이너 대학에 속하는 한신대에 다녔고, 그나마 경기도 큰 도시의 수원에서 보다 더 들어가야 있는 곳이었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것은, 조용한 한신대이다. 걸어서 병점에서 들어가는 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추울 때도 그러했고, 한낮에도 그러했다. 한 여름에도 그러했고, 다시금 추울 때도 그러했다. 계급이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방향적인 측면에서, 나는 무안이나 함평의 벌판을 가는 것 같았다. 그곳은 바다와 만나 있다. 무안의 이모집에 갈 때의 기분과도, 아주 엇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가상공간과 현실을 만나게 되었고, 나의 신학 공부의 신경숙 깊은 기쁨의 자리에 도달하였다. 학생 본질의 영혼 사진 콘테스트에서는, 학생은 기본적인 외모만 있으면, 책을 많이 읽고, 그것을 보다 많이 파이프 오르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돋보이게 되어 있다. 나의 롤 모델은 누구였을까? 안병무? 장준하? 임석진? 이준모? 당연히 김경재? 나의 롤 모델은, 저기 광주에서부터 프리드리히 헤겔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지선상의 아리아이다. 선생은 대게 초상화에 있었다. 그것은 공자도 그러했고, 노자가 특히 그러했다. 나는 둘 다 채지충 이상으로 그들을 생각하였다. 경기서적이 수원역에서 보다 안쪽으로 옮겼을 때였다. 아무 일 없었다. 보다 빽빽하고, 어수선한 곳이, 플라타너스, 인지아닌지 모르나, 오십미터 더 걷는 철학로가 생긴 것이고, 서점이 일층 이층 삼층까지 생겼다. 그것은 나의 스펙, 지성소 같았다. 나는 내가 승리해서, 기념비가 생긴 것인줄 알지 못했다. 보다 걸어서 나는 영화를 추구하였다. 음반 가게는 경기서적에도 있었고, 팔달문 가까이 여러 문화 경제 카페 혼합 공간에도 하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쌀쌀맞았다. 경기인은, 전라인을 아주 오래전 부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부로 안준다던지, 서로 딴말 한다던지, 안좋은 것을 준다던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프리드리히 헤겔이고, 다른 하나는 김경재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인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클래식성은 수원의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서부터 이미 빽빽하다. 나는 수원에서도 귀공자 같았다. 그것의 양명학은 분명 없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그리고 서울을 앙망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서울을 간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그러하고, 부산에서, 양양에서, 포항에서도 그러하다. 지금은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남자는, 이런 식의 절대적인 백제는 곤란한데, 군대를 또한 다녀온다. 군대는 녹색 보기의 시험장과 같다. 피가 아마도 녹색으로 변질할 것 같은, 가상공간 같다. 처음으로 그러한, 아지랑이 같은 발음으로서의 열라의 대상들을 만난다. 그리고 앙망하였던 서울로 복귀하는데, 이미 전선은 복잡할 데로 복잡해져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기분에, 광주에서 다시금 프리드리히 헤겔을 읽는다고 쳐보자. 의정부에 살던 민정이와, 부천에 살던 형숙이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스펙처럼, 주공아파트 그 가지런한 배치 위에서, 방학을 정신과 육체의 변주곡 같은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보면서 보냈다. 책을 전대 도서관에서 읽다 쓰러질 것처럼 읽었다. 음악을, 혼자만의 겨울을, 테이프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경주하는 것처럼 읽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독은, 패쇠적이고, 지배적이며, 광주시를 내리누르는 조선대 본관 건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떨어져나갔고, 친구의 기본 요소, 타진 고기와 몽롱한 소주. 내게는 개념과 클래식 음반과, 그것들의 본질과 나를 맞바꾸는 헤비급의 복싱만 있었던 것일 것이다. 경기도는 약간 복잡하고, 오밀하며, 조밀하고, 먼지 많은 곳은 보다 먼지가 많고, 서비스가 평범한 곳은 보다 평범하다. 요사이 수원역 앞의 거대한 빌딩의 빽빽한 간판들 같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것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서울이 대체 어디인지, 그래도 서울은 분명 있다는 것으로 지나는 것이 전체 계급 소설의 전부인 것일 수 있다. 경복궁은 분명 우습지 않으나, 조계사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웃기고, 조선호텔도 그러하다.
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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