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상상력'이란 책은 굉장히 오래된 책인데, 드라마타이즈드 어워즈 해태......
우리가, 이론가나 사상가가, 그 사람이 화성처럼 인구가 하나도 없다고 해도, 드라마를 홀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홀대는 이유가 있고, 선택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홍대, 서울에서 여자에게, 실은 남자에게, 차인 여자가 부산에서 대우를 받는 센스엔 콘솔레이션으로 넘어가기를 거절하고, 결단하고 절단하여 사는 해양대학교처럼, 우리가 사과나무와 스피노자, 스피노자가 있으니까 세계의 종말이 있는 것이다는 좁다란 세계에서만 마지막이나 못다한 삶에 대한 슬픔이 북받치는 것이 아니다. 김지수가 근초고왕 드라마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나처럼 생긴 감우성의 품에서 죽은 것처럼, 그것은 드라마 작가와 감독 모두의 고백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산에는 고신대가 있다. 그 사람들의 책이나 논문, 설교를 듣지 않고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될 것이나, 사람들의 모임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한신대의 클래시컬한 데지그네이션이 되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초과달성을 했는데 깎였는지, 쏟아부었는데도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신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다른 대학에서 대단히 영롱한 피사체를 수업시간마다 쏟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유진런의 변증법적 상상력과 북항대교 연결이 된다..........
사람은 지나치게 낯설게 되면 죽게 되어 있다. 청년들이 신교대에서 죽을 것 같은 것은, 지나치게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의 추궁을 받아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대에 못미쳐도 죽게 되어 있다. 해양대 어느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런저런 정리 중인 아저씨를 만났다. 그래서 사진 이야기도 하고, 오늘은 시티 투어 버스를 타보려 한다 했다. 그랬더니 다른 것을 제안하고는, 투어 버스는 권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의 종합판단은 아저씨의 생각으로는 내게 못미칠 것 같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긴 오토바이 타고, 새벽에 질주해서, 해운대의 일출 사진을 찍기도 한 사람이, 버스 타고 광안대교를 건넌다고 더 무엇이 있을까도 싶은,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일종의 반야지이다. 부산은 영화와 드라마의 도시. 영화는 사람들의 그와 같은 반야지의 보고이다. 사람은 지나치게 낯설게 되면 죽게 되어 있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젊은 신혼 부부이고, 바닷가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처럼 단장의 휴우케가 없다. 바람이 많이 불면, 낯이 설게 되어 있고, 빛이 너무 밝아도 낯이 설게 되어 있다. 부산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이 동시에 있는 곳은 정신이 열정이 아니면 생존할 수가 없다. 남자는 형이상학을 연구하고, 여자는 페넬로페처럼 길쌈을 한다. 남자는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가고, 잡은 고기를 구입하는 계층이지만, 배가 한 대 남아돌고 있었고, 남자가 돈이 제법 있었으며, 바다로 어느 때는 다른 어부들처럼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종대에서 유람선을 타고 나면 감칠맛이....... 남자가 고기를 잡고 돌아오면, 여자와 아이는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라디오 채널로써 달려가 맞이한다. 너무 가슴이 벅차서, 한국말이 그만 경상도 말씨로, 더 벅차서, 주자학자인 남편이 고기도 잡을 줄 안다면서, 말투가 일본어처럼 변한다. 당신 강고꾸노 고기 이빠이 데쓰네? 그것은 어학적으로, 경상도 사투리적인 어미 데이의 기원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대신에 남자는 차분한 서울 말씨이다. 미소를 머금고, 주변에 마땅한 경쟁자가 없다는 이유로, 개선장군의 신학적 라디오 채널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입어재끼는 기장군 신학.......
드라마는 학교로부터 피신한다. 그것은 죽음과 소녀 같다. 어째서 그와 같은 화성의 달과 같은 풍경인지 누구에게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그것은 실은, 학교 자신이 학교로부터 피신한다고 하는, 극적인 쓰나미 현상에의 원자폭탄의 핵과 같은 구조이다.
사람들은 로드윈과 데이스타를 두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데이스타가 퀵 아저씨들이 이용하는 차이고, 시트고, 짐을 실은 상태에서의 발착지성, 로드윈은 같은 엔진에 네이키드로써 보기 좋은 것으로만 구분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데이스타를 탄 뒤에는, 사람들은 로드윈을 두고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아직까지 책 읽는 사람의 바닷가 절벽 같다. 우리는 야구를 하고 있어야만, 야구장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로드윈은 공부가 미쳐 마치지 못한 상태에 대한 데지그네이션이 있다. 데이스타가 공부한 기억은 망각한 상태에서도, 여래장을 끌어들여,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환상 속에서 만나는 자태, 이야기와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로드윈은 유진런의 변증법적 상상력이 만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깊은 가지산 터널 같은 기분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지산 터널이 한국에서 가장 긴 터널이라면서, 포텐시의 관점에서는 로드윈의 손을 들어주겠으나, 데이스타가 만나는 논과 밭 모든 곳에서 풀꽃 같은 환대를 받는 것에 비한다면, 그 짧은 터널이 무엇이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같은 엔진이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논쟁은 보다 변증법적인 지양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로드윈의 구조는 매우 담백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설립. 학자들의 면면. 비판철학의 형성. 기존철학자들에 대한 정리. 젊고 싱싱한 영웅주의. 맑시즘과의 관계. 정신분석학과의 관계. 전부 다 드라마 같은 구조 속에서, 나찌즘에 대한 분석. 예술과 미학에 관한 연구. 그 속에서의 벤야민의 죽음. 벤야민이 프랑크푸르트학파였는지. 그들의 전쟁통에서의 안부. 미국으로 이민한 아도르노의 음악에 관한 횡설수설.........
어떤 드라마가 있는데, 학자 한 명 나오지 않는 드라마의 영원한 중력 안에서, 학자들만 나오며, 학자들의 발표 내용만 나오고, 그들의 삶과 죽음, 영국과 미국에서의 교수됨과 거절, 그런 것들로만 되어 있다면 혹자들에게는 매우 인기를 끌 수 있는 것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것 같으나, 생각보다 많이 듣고 있고, 엘리트들이 클래식만 듣는 것 같으나 윤일상의 영턱스 노래도 짧고 영원하게 들으며, 사상가들만 논쟁하는 것 같으나, 시골 촌부마저도 비트겐슈타인 같은 머리모양을 하고는 얼굴도 씻지 않은 채로 어촌을 바삐오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학자들만 나오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존재가 아니라 역사이며, 역사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나아간다는 말을 해대는
사카린.........
윤아와 티파니가 여대생인데도 알아듣는 눈치로, 꽃술을 관념인들을 향해서 흔들고 지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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