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최제우와 최진희론......
바흐의 인벤션을 듣다 보면, 그것이 진리로 채워지는 나실인인 경우,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발견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불교가 숱한 욕설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과 연속한다. 우리는 의미를 알아야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 낙산낙수 하는 것도, 요산요수라고 부른다고, 마창대교를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가다보니 반성문도 작성하는 것처럼 짜증스러운 것의 이국적인 느낌 같은 것. 남의 나라에서 잘 모르는 경치를 즐겼으니, 이상한 행정은 각오하는 것이 좋다라는 메아리는 결코, 기쁜 일이 아니다. 나는 양수경과 이태란이 하나된 것 같은, 약간은 평범한 얼굴을 보고서도, 그것의 연속극 때문에 기쁘지가 않았다. 사무실의 위치와, 지하실로 내려가는 방법을 알려주는데도, 나는 바께쓰를 옆에 끼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래도 향기나고 좋은 것을 담아야 한다는 의무가 가슴 깊이 꽉 차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다를 동경대전처럼 행하나, 나는 늘 이렇게 유사 행정에 대한 전시 체제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하니, 나의 이런 말에 열광하는 분자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이런 수다가 동경대전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방곡령, 동학 농민 연속극을 강제로 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얼굴의, 목소리는 양수경, 노래는 후애의 앨범 수준으로 하는 사람의 남편의, 이런 견딜 만한 자극성의 문장을 만나지 못해서, 비극적인 근대의 비창들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육이오도, 비엔남워도, 그렇다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 물을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찬성, 답을 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최진희의 영토도 있다는 것. 사람들은 양수경이 나와 대립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쌍을 이룬다면, 에프지원앙, 너무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할 것이다. 문제는 황산벌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가진 재산이라고는 신앙심과 몇 개의 앙가주망 밖에 없는 여자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직장에서, 저수지의 개들처럼, 관망들 하고 있다.
*
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만 중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동시적으로 그것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측천무후 같다. 발음상으로도 사마천과 측천무후는 유사하다. 양귀비나 왕소군, 중국 미인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게의 미인들은 최진희를 거치지 않고, 양수경의 가능성만을 지닌 채, 절대자 앞에서 춤추는 아기 공룡이 되고 싶은 소망 교회 같은 것이다. 최진희는 그것을 거절한다. 그것은 중국이다. 그리고 양수경도 거절한다. 최진희는 그것을 기뻐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최진희의 눈에는 양수경은 춤추는 아기 공룡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태지를 좋아하는가? 대써. 데써. 그런 가르침은 데써. 불교가 욕설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패스한다는 대승경의 차원에서, 서태지가 발성과 효과음의 애잔함으로만 영원하지, 이지영의 인벤션으로는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욕설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다만 누가 내 어머니냐 하셨을 뿐. 최진희는 슬프다. 그녀도 호빵을 맛있게 먹고, 인벤션을 눌렀기 때문이다. 내가 젊었던 그녀를 사랑했다는 기억이 없다. 나미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연변에 더더욱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리고 얼굴 없는 방송계의 안테나들도 그것을 슬퍼했다. 양수경이 최근에 큰 슬픔을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영화를 누렸던 것과는 대비가 된다 할 것이다.
내가 최진희를 좋아했다고 직접적인 언급을 했다면, 도시 속의 여자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다......
경남과 호남의 접경, 그러니까 한반도의 남부에 사천이라는 곳이 있다. 사천이 먼저인지, 아니면 측천무후가 사마천의 원인인지, 우리는 공부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중국인을 사랑하는 이유와 같다.
그들은 이런저런 무기가 많고, 군사의 수가 많을 때만 우리를 이길 수 있다......
사마천의 어느 왕의 기록에, 말을 타고 가다가, 노애들이 접근해서, 자기들이 먹을 것이 없는데, 말을 먹을 수도 있겠느냐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정약용의 투어를 가다보면 반드시 무슨 거세시를 만나는 것과 같은 삶의 확률이다. 그래서 왕은 자기의 말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왕이 중국인이고, 중꿔렌, 노애들도 중꿔렌들이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애들이 그나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아닌, 그래서 이름이 노애라고 한다면, 우리는 측천무후도 사마천을 갚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래는 젊음과, 노동하는 사람과, 길을 가다가 지쳐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 그것은 꼭 최진희 같다.........
그리고 중국인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다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무거운 솥을 들어올리려다가 몸을 다친 왕자인지 왕의 기록이 있다. 바하가 유럽으로 갈 것도 없다는 느낌이 거기서부터는 든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고사가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너희는 질주하여서 (0) | 2013.10.24 |
|---|---|
| 갑신일록을 다 읽었다. (0) | 2013.10.23 |
| 근대 어느 즈음엔가 양반이 테니스 하는 외국인을 보고는 (0) | 2013.10.18 |
| 개박지윤의 카드를 방금 보았다. (0) | 2013.10.18 |
| 생각해보니 그렇다. (0) | 201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