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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by 마음대로다 2026. 5. 1.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우리들의 노동절에, 너무 삭막한 싸움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이번 년부터 다시 쉰다는데, 그것도 좋은 음악적 템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아주 많이, 내게 한정 없이, 마츠다 세이코를 미는 바람에, 나는 그래서 떠밀리기로 했다. 나는 어쩌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어떤 인물처럼, 연오랑처럼, 세오녀처럼, 그렇게 바다로 떠밀려지는지 모른다. 박찬호 공주였다면, 신현균 광주였던 것일까? 뭔 그런 대위법이 있다 싶다. 신바람 이박사였듯이, 신바람이 지명일 수도 있고, 이박사가 지명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송대관이 죽은, 우리들의 가요의 대지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 화려하게 있지만, 때로는 겨우 있는, 어느 시골집의 옛날 백열등을 끄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들의 대지를 지나다 보면,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빈집과 빈집이 아닌 것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쉽게 전대 상대적인 것이 된다. 너무 반듯한 빈집을 만날 때는, 사람이 살아도, 거의 빈집이나 다름 없을 것 같을 때는, 우리들의 새마을 운동이, 이와 같은 바닷가 빈집에서 헤어지는가 생각하게 된다. 나는 늘 떠밀려진다. 그것은 마치,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민족 운동 같다. 막걸리 하나 먹고, 통일을 꿈꾸던 화엄사. 그와 같은 폭력적인 투구의 자격이 없는, 숱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 다만 나중에 나타나게 된, 나카모리 아키나는 더욱 나중이거나, 그 이전이거나 할 것인데, 그렇게 나타나게 된 공룡 영화의 오징어 한 축이 되던지, 영덕 대게가 되던지, 프레데터가 되던지 하는 운명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영혼이 빼앗기지 않을 방법은 무엇인가? 차라리 영화에 영혼이 모두 빼앗기면, 국가 간의 전쟁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소피아 로렌,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데, 그레이스 켈리, 데보라 커, 생각나지 않는데, 아무튼 로마의 휴일에서 그렇게, 우리는 손을 넣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 같은 장난을 치는 외국 남녀 같은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도식은, 어느 정도, 세계정신의 팔 할 정도는 맞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니 그것이 어쩌면 대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공유인 것이고, 어디서부터 사유나, 소유, 사유리 같은 것인가? 그런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나와 마츠다 세이코는 무슨 사이이냐 할 것이다. 둘이 잘 어울린다 한다. 나이가 서로 많이 먹고, 그러나 내가 글을 쓰면, 마치 포도주스 같은 글을 쓰면, 그리고 다른 주스가 많은 채로, 초고층 아파트에서, 냉장고에서, 거만하게 하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 산행을 다녀와서, 막걸리와 도토리 묵을 먹으면서, 통일을 꿈꾸던 술 취한 화엄사, 꼭 그런 것처럼, 고등학생 시절, 작은 냉장고 안에, 델몬트 유리병 안에 담겨 있던 보리차처럼, 딱 하나, 포도주스가 있는 것 같은 글을 쓰면, 현실의 마츠다 세이코가 아니라, 과거 아름다웠던 마츠다 세이코가 혼불, 초혼, 그렇게 김소월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일본은, 아직 그런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다만 형식주의적인 연애 소설류의 영화들이 지금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맞는, 어떤 교실의 반 번호처럼, 걸려있는 플라스틱 명패처럼, 학생들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무의미하다, 혹은 무리데쓰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따뜻함이다. 남의 따뜻함이고, 우리가 겨울에, 수많은 엉뜨들을 놔두는 것처럼, 마치 남 같은 길고양이들이 잠을 자는 것처럼, 그렇게 놔둘 수 있는, 풍요 속의 풍요의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마츠다 세이코 좀 어떻게 해달라는, 그런 원성을, 다시금 유튜브의 무심한 게시처럼, 한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나도 그렇다. 내가 꿈으로 들어가서, 마츠다 세이코를 만난다면, 그녀가 젊어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노래는 거의 비슷한 것을 부른다면, 약혼식을 열고, 기자회견을 하고, 결혼 생활을 일본에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마치 버뮤다, 이범호다, 삼각지처럼,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 일은, 나카모리 아키나에서, 이미 경험했던 어떤 씨츄에이션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에어 부산. 에어 서울......

 

아시아나 항공.....

 

*

 

아버지가 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의 위기 속에서, 상승의 지표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의 원폭 얼굴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거의 모든 벚꽃 길에 거쳐, 문학을 설명할 수 있는 교수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목적이다. 그리고 에어 부산, 에어 서울, 계속해서 숨을 쉬면서, 아이들은 현실의 학씨 아저씨처럼 변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이유였다가, 박보검이었다가, 갈수록 학씨 아저씨처럼 변하게 된다. 가끔 아이유였다가, 박보검이었다가, 그러나 마음은 늘 언제나, 케이티 위즈에게 기아 타이거즈가 지고는, 얼굴이 학씨 아저씨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은 없다. 빛을 향해서,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대신에, 벚꽃이 가득히 핀 저녁 나뭇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사람들이 보고도 깜짝 놀라지 않을 만큼의 외모의, 뱀으로는 지나고 싶은 욕심은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상상을 하고. 섹스도 하는......

 

나뭇가지끼리는 표절할 수가 없다. 대나무와 매화나무 가지는 당연히 다를 것이다.

 

마츠다 세이코는, 그와 같은 뱀을 쥐고 있는, 시바 여신처럼 우리들에게 나타났다. 가사는 멜로디에서 죽는 것인지, 아니면 멜로디로 인해서 사는 것인지, 판별하는 음악 평론가가 없다. 일본에도 없고, 한국에도, 중국에도 없다. 그냥 공만 던지는 것 같고, 공만 치는 것 같다. 가사가 멜로디에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가사가 멜로디에서 산 것인지, 멜로디로 인해서, 힘을 얻은 것인지, 그것의 결론은 마치 밤 열두 시를 넘기는, 옛날 느낌의 연장전만 같다.

 

마츠다 세이코는 철의 여신 같다. 친구 중에 철이라고 있는데, 성은 전씨. 그 친구의 여신 같다.

 

뱀이 사람들을 낙원상가 하게 하고, 이제는 어떠한 코드를 쳐도, 즐겁지 않다고 하면,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하면, 다만 낙원상가만 있다는 느낌이다고 하면, 스테어웨이즈 투 헤븐, 서주를 칠 때, 미국의 악기 상점의 점원은 마치 전기 고문을 받는 느낌이라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노동절에, 살아있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 하고, 조금은 애타게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유길준의 동도서기론 같다. 다른 내용이 하나도 없는. 헤겔이 기가 막힌 유머를 하나 제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개념의 운동이라는 말이었다. 디 베베궁 데어 페어눈프츠. 베그립츠. 생각나지 않지만. 그런 음악적 기억이 있다. 얼마나 아버지 없이, 그와 같은 운동이 계속되겠는가? 여자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뱀의 무의식은, 오래된 비극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김유신의 말처럼 가는 것이다. 김유신의 말도 구하고, 그가 사랑한 기생도 구하는. 그런 해피엔드 같은 것은.

 

나카모리 아키나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화랑 김유신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리고 마츠다 세이코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무한하게 슬펐고, 나는 나중에야 그런 견딜 수 없는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모든 그림자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와, 기자들의 뒷모습과, 다소 사무실 직원처럼 보이던 나카모리 아키나도, 지금 머릿속에서 상상하면, 교토의 금각사처럼, 절절하게, 너무나 애절하게 장면이 그려진다. 우리도, 티비를 향해, 영화를 향해, 기형도처럼, 뱀이 될 운명이었다. 뱀이 될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서, 벚꽃을 심은 것은 아니지만, 기형도는 그것을 위해 입 속의 검은 혀라는 시집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의 마지막 공간들의 능지는, 그것을 흙으로 덮어 연결하는, 신라의 고분은, 사랑이 아주 많은 것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한 사람의 산문이,

 

그 모든 죽은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는 때가 올 것이다, 기형도는 예감했던 것일 수 있다. 어둠 속에 걸을 때는, 광주에서 창평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 담양 어딘가에서 걸을 때는, 자기가 가장 밝은 이이다. 그런데 뒤에서 맹렬하게 밝은 빛으로 다가오는 차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자기는 입속의 검은 혀처럼 되고 만다.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이들이 죽는다. 노래나 듣는다는 것은, 나카모리 아키나, 마치 가짜로 사는 것처럼, 그렇게 분수가 분모와 분자에 무수히 다른 숫자들을 대입하면서 연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듣는 귀는 있으나, 말하고, 글을 쓰는, 마츠다 세이코 같은 벚꽃이 아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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