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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지역감정은 신학이었는가?

by 마음대로다 2026. 5. 17.

 

지역감정은 신학이었는가?

 

 

 

 

 

 

 

 

 

고단샤, 고마쿠라, 가와구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야외에 놀러 가서, 버너에 불 붙이는, 불교적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은 하는 수 없다. 우리나라에 한 명의 헤겔 철학자가 나오지 않았데도, 우리가 나름 지식의 상승을, 승상, 그런 것들을 고조선의 형태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게 다 한동안 유행을 했던 지역감정 때문일 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빅풋을 찾지 않지 않는가? 함께 빅풋 찾으러 갔다가, 친구가 여자가 되어 나오면, 마음이 약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은 얼어붙겠으나, 사는 것이 그렇게 여수에서 갓김치파는 것처럼, 한갓된 것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최강자가 있을 것인데, 그는 그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한 사람이 여자가 되고, 한 사람이 얼어붙는 것을 뒤에서 보고, 빗풋,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선희의 한바탕 빅풋, 그렇게, 미국의 케이마트,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지역감정은 신학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신현균의 한신신학은 전라도의 것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고신대가 약간, 그것에 안티, 안에 티를 입는 스타일의 체크무늬 남방, 다시 생각나는 남방항공, 그런 영화는 없는, 소설도 없는, 제목, 흑룡담 사찰에서, 아무튼 안티를 걸었으나, 그들은 힘이 없었고, 한국에서 누구도, 영남에서는 누구도, 철학적 신학,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 실제로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신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목양지상주의로 나아간다. 김경재 교수님도 살아계셨을 때, 그것들과 부합하는, 합치하는, 조정치, 그런 식으로 설교할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적으로, 막가파적으로, 철학자들을 언급하는, 조직신학적 면모를 보였다면, 나름 지금의 청년들에게, 아니면 이제 죽을 날짜만 남은 신학적 수의의 목회자들에게, 기억이 되고, 영향이 되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적 설교도, 나름 파미르 고원이다. 고원에는, 한 개의 우뚝 선 산이 있을 수 없고, 우리가 태백산맥, 백두혈통 하듯이,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마지막에 이르러, 옛날 전투기 전체에 불이 번진 사람처럼, 스타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내 친구 전철도 그렇다. 그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만화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식, 어쩌면 진지한, 그리고 죽을 각오를 한 자기 작명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문장들도, 기존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의 광기가, 나와 같은 힘은 아닐지라도, 그런 것이 있는 것이 분명 엿보였다. 사람은 간 만큼, 기억하게 되어 있다. 간미연이라든지, 맛이 갔다든지, 그런 한국어의 뉴요커적인 하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기독교는, 목회자가 간 만큼, 정화의 해외 원정처럼,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대성회나, 대부흥회를 하지 않았다면,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에서 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하지 않은 기독교로서 남는 것이다. 했으니까, 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있는 것이다. 김경재 교수님도, 조직신학 교수이고, 설교도 그렇게 아름답게, 한국어적으로 잘하니까, 잘한 것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김경재 교수님이, 대충 논문만 발표하고, 논문집만 발표하고, 설교는 없는 것으로 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분위기를 또한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는 분위기를 얼마나, 지금, 작금의 한국의 기독교, 청년들의 공부 모임에서 많이 확인하는지 모른다. 바로 거기에 조영남이 있다. 우리 영남 학생들이 있다. 회전하는 안 칼날 같은. 가끔은 회전도 안 하는 것 같은. 영혼이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회전하는 안 칼날에도, 이미 가루가 되어 있는. 김창락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마다, 한신대 학생들은 기뻐하였다. 신약학이라는 것은, 사람의 향기, 강의자의 기세인 것이다. 내용은 하나도 가질 것이 없어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나 그의 목소리와, 수업 분위기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회전하는 안 칼날의, 이미 가루가 된 영혼일지라도, 부유하여, 진행하는, 포항에서, 속초에서, 울릉도로 진행하는, 위그선 같은 느낌도 있었다.

 

지역감정은 해태 타이거즈의 적극 정신에서 이미 녹아버렸다. 대신에, 그것이 얼마나 큰 자충수나, 거대 지진이나, 다이나마이트 같은 것이 될 것인지, 오히려 그런 기대나, 가능성, 어떤 조직적 형식 같은 것까지 우리가 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 있는데, 죽어 석림이 되어 있는데, 죽어 중국 기차의 연와에 누워, 지도에도 없는 도시에 가고 있는데, 어떤 의사라고, 지역감정이나, 민족감정의 전기충격을 시도하지 않겠는가? 한 사람이 울릉도 헤겔 엿을 먹고, 기쁨을 누린다면, 한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들의 미신처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라, 가혹하고, 정확하다. 저 깊은 곳의 민족을 향해, 민족감정을 일으키는. 그리고 정신과 언어에, 회전하는 아무런 믹서기의 칼날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지역감정의 문제를 내놓는, 그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은, 높은 산의 그림자처럼,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마치, 붉은 산처럼, 죽었으나, 누군가 민족감정의 전기충격을 주고, 돈 주고 사고, 지역감정의 전기충격을, 해태껌을 돈 주고 사고, 롯데껌을 돈 주고 사고, 그래서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 타다가 일어선 것처럼 정리가 될 수도 있다.

 

지역감정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흐지부지, 약간 김경재 교수님의 아름다운 설교들처럼, 사라진 것도 놀랍고 그렇다.

 

그러나 쿤밍에 한 번 다녀왔지만, 쿤밍의 지역감정은 어마어마하다. 태풍처럼 거대하다.

 

태풍이 지역감정이면,

 

작년에 우리에게 태풍이 거의 없고, 일본으로 많이 갔듯이, 일본은 아침에 일어나면 민족감정으로 일어나고,

 

지역감정으로

 

시코쿠하게 일어나는 것이 정대세인 것 같다.

 

인도는 시크교도......

 

감정이 신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거울들을 어떤 설치의 기술로써 상자에 넣으면,

 

민족감정이 신학이었던

 

무한의 고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 끝은 보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