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과 거라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현대 정신의 풀 에이도스
어디서부터 재미가 없어진 것일까? 그것은 사실 벤허나 천지창조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신사처럼, 숙녀처럼, 레이디즈엔젠틀맨, 현대식 형상들의 실제들을 거닐면서, 혹은 고전적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경복궁 돌담길, 만끽한다. 박정희 정권 때의 종묘 느타리 버섯 공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법 진지한 와이셔츠의 종로 소재 방담꾼들을 지금의 건물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내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서울의 종교교회는 우리가 아는 릴리전이 아니라, 무슨 종에 다리교 무슨 다리 교회라는 말이라고 했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바일 띵이 있었다. 대신에, 영화로움이라고 하기에는, 내게 너무나 많은 질타를 받고 있어서 그게 작동이 되지 않는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심은하 부부가 나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가난하지만 그래도 부자고, 아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나눌 수 있는 서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나랑드 사이다. 나랑 이야기만 하면, 세상은 쪼개지고, 혹은 과자처럼 부서지지 않고 아직 자연의 섬유질처럼 바가지는 두껍게 머리를 강타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인격이 없으면서, 신성에 의지를 많이 하고 살았었다. 방망이 깎던 노인만 하더라도, 그냥 깎는 노인이다. 인상주의이기도 하고, 내가 지적하는 소재주의이기도 하며, 저녁 깊은 특정 시간에 이르러서는 성기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 삼자는 조금도 우리는 떠올릴 수 없고, 말투가 희득이인 사람을 만나면, 청계천이 범람할 때, 자기 것을 보태서 버릴 수는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인데, 학생들은 그것을 읽으면서 방망이 토템이 되고 만다. 나는 헤겔의 미학을 통해서, 스컯쳐마저도 철학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것은 즉자, 즉 대상 그 자체와 대자, 그것의 언급할 수 있는 관계성, 혹은 보기 좋은 대상적 높이들이었다. 방망이 깎던 노인이. 지나가던 도둑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잡았다는 이야기. 아니면 박태원의 소품에서 등장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노인이 바로 방망이 깎던 노인이었다는 퓨전. 우리는 만나고자 하는 사람과의 약속이 캔슬되고 나면, 급격히 제 삼세계적인 서울 풍경에 잠식 당하고 만다. 한신대생은 가슴에 냉장고를 품고 다닌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운명의 장난처럼, 보다 높은 커트 머리들을 서울대 연고대 서강대 중앙대, 숭실대는 비슷하지 않나 하는데, 그것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음대에서 죽어라고 음표들을 쳐봤자, 연대에서 비싼 핸드백에 어느 날은 깊은 화상을 당하고 난 뒤에 연습에 임해봤자, 그것은 방망이 깎는 노인조차 되지 못한다. 한신대 신학과생들이, 이상하게 답답한 복음성가에서부터,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심혜진, 절기마다 자기의 성리학을 담아서 노래를 부르고, 교회에서 드럼도 치면서 찬양하고, 찬양의 목적은 뚜렷하고, 하나님, 그것을 두고 기도와 같은 애드리브를 곁들이고, 우리는 죄인이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의탁하오니, 받아주시옵소서, 하이데거의 양명학적 존재론의 전형을 이미 배우고 있고, 여학생은 그룹 티아라처럼 애플 이스 에이 김지수의 에덴 동산의 마지막 풍경처럼 내 눈 앞을 가로지른다. 그러다가 그 중에 철학과나, 신학과, 종교음악과로 치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탑이 되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 못해도. 바르트의 아내처럼, 피아노를 아주 잘 치고. 바하나 베토벤 연주에 탁월하면, 그것의 규모는 정트리오는 오히려 못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에어컨은 자주 외부 바람을 맞는다. 그것은 마치 조절 같다. 혹은 조정 같다. 그리고 근정전에서처럼, 종합대학교의 국문학과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진지하다. 그것은 복음성가를 부르다가, 눈을 감고 갑자기 일제히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스키너의 행동심리학이다. 이것은 지식이 필요하지만, 기계적 반응 심리학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으로는 오토바이를 탈 수 없고, 우리는 이미 지하철이네 전철이네 천연가스 버스네 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선입견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그것의 직관이 아마도 라깡이 아니었나 한다. 지능이 있으면, 당연히, 꿈의 해석을 통독하지만, 그것을 그 정도의 부피로써 방관하지 않는다. 나는 어제 오늘 매우 비상한 꿈을 꾸었다. 나는 둘다 별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능은, 테니스 코트의 라인과 같은 시각적 어감적 느낌이 단어 자체에 있다. 라인이 없는 것으로 하는 것도 운동이고, 충분하지만, 친교로서는 최고이고, 그러나 아카데믹한 연구의 유비는 되지 못한다. 사람이 천년을 공부해도, 악몽을 꾼 뒤에 그것에 휘둘리게 되면, 천년 공부 말짱 도루묵이 아니겠는가? 그것과 같다. 지금. 우리의 위기는. 최대한. 유니버셜솔져의 맥시멈 리스크 같은 제목의 영화를 꿈꾸게 한다. 다시 라인이 사라지게 되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하게 된다. 그들은 결코 아카데미의 적대적 요소가 아니다. 그들도, 심혜진 깊은 곳에서는, 히포스타시스의 계단에 오르고 싶어한다. 다메섹 도상 같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두려움은, 우리들의 두려움은, 체격이 다부진 사람이 군면제 판정을 받고 평생 그것을 비밀로 하고 사는 것이다. 경찰 존재의 삼대 요소가 무엇인가? 부촌 치안. 소요 방지. 월급 축적이 아닌가? 아니면 뭔가? 경찰 영환가? 얼마나 많은 경찰들이 어려서 성룡 경찰 영화를 보았는가? 둘은 간께나이데쓰이지만, 간께가 있는 것을 극구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에어컨과 에어컨이 될 것이다. 경계는 마치 뱀파이어처럼 타들어간다. 미국 영화는, 영국 문학은, 하이데거의 근본 기분 그룬트베어스티뭉?이라는 용어를 두고 모두 바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게는 엿보인다. 맹목적인 영화의 한 장면. 전투함에서의 포탄 장전과 같은 매끄러운 선반? 공학. 그리고 전쟁 영화의 안과 밖 같은 동두철액. 에어컨이 죈가? 아니면 영화가 죈가?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기계 문명이 죈가? 폴리탄들은 가장 좋은 것을 알지만, 교사가 되어서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교육 제도 속에서, 이와 같은 행동이 좋은 행동이다 같은 것은 절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의 그럴싸함은, 여차하면 경찰 영화는, 이미 두뇌 깊은 곳에서부터 사넙 같은 것이다. 내 근처를 배회하고, 지능을 과시한다. 그것은 마치 태초부터 우리는 놀고, 제네.시쓰 같다. 그렇다면 서양의 철학은 대체 뭔가? 어떻게 생긴 것인가?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의 독특한 유행. 자동차 전용도로. 냉무 (0) | 2012.07.26 |
---|---|
미국은 어째서 저항도 못하고 자궁이 되었는가? 배트맨 라이즈 (0) | 2012.07.23 |
미국의 트래지디와 구일일 사태의 양명 공주 가설 (0) | 2012.07.21 |
머리 깎는 년들 중에, 하늘 아래 개쌍년들이 많다. 냉무 (0) | 2012.07.20 |
어째서 학문이 있고, 그것은 한 사람이 죽기까지 비밀인가? 사진들...... (0) | 2012.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