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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시골에서의 카바이트는 미가와 십자가의 중간 형태인 것 같다.

by 마음대로다 2014. 7. 7.

시골에서의 카바이트는 미가와 십자가의 중간 형태인 것 같다: 우리는 통계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문명 속에서 얼마만큼 비정상과 원시와 반문명을 사는지 문선명도 모르는 것이다. 살인 사건이 그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것은 성스러운 땟국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데, 친구에게 아양을 떤다고 치자. 땟국물은 관점과 같은 것이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전신주와 같은 것이고, 위치추적 같은 것이다. 서울은 대구인가? 아니면 대구가 서울인가? 광주가 부산인가? 아니면 부산이 광주인가? 대구는 정말이지, 해안마을 같다. 해안마을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의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침식된 결과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럴까 백 번 김구 생각해본다. 자연침식해서, 정말이지 똥그랗게 되는 경우가 세상에도 많고, 우리나라에도 하나가 있다고 정말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가디스 러브, 여신 사랑이다. 해안마을은 기념물 같은 것이다. 영어로 마뉴먼트. 무엇을 기념한 것일까? 그것은 물질문명의 대구론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데올로기도 한국말이다. 이데(二大)올로기이다. 사람들은 관념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가 없다. 데이스타만 타고, 데이스타를 잊고, 데이스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업글병이 도지고,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필요한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형이하학은 아니겠지만, 토크 같은 것, 묵직함 같은 것, 이목 같은 것, 그것이 다만 안정이나, 주변 사람들의 무시하지 않음 같은 것을 조장한다고 하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자학은 없는 주제에 성리학이 과다하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카바이트가 미친 것 같다. 마치 내가 주자학을 미쳐 날뛰면, 자기 남편인 시진핑이 가져갈 것처럼 호도한다. 두 천씨 형제가 마치 쌍동이처럼. 그들은 순수하다고 하나, 디스카디드, 카드를 버리는 것인지 우리 인두껍의 세상에서는 그 속을 좀체 알 수가 없다. 신과 인. 그리고 혼과 육. 그것을 하나하나. 말하고, 생각하고, 이행하고 하기가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마치 바보처럼, 사랑을 생각하면 그 다음 날도 사랑을 생각하는 청바지의 백낙청 흰 색의 와이셔츠 소년소녀들처럼, 마침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육체를 생각하면, 관념이 바가지인데, 유물론이 되는 것도 같은 방식인 것이다. 자세히 보면, 육체 둘에 관념 하나, 육체 둘에 관념 하나, 그렇다고 보면 육체의 총량이 관념에 비해 두 배 가량이 되는데, 그것이 마침내 관념으로 위치이동, 아우프헤붕하는 것이라 믿는 것이 바로 유물론이다. 우리가 육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육체로 생각한다면, 관념주의자도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둘을 생각하고, 강조하는 미망에 걸쳐, 그것이 우선인 것처럼 생각하는 작금의 티비와, 영화, 예술, 동양은 늘 언제나 덜떨어진 논문과, 플라톤이 정말이지 호구삼합, 아무런 학자 한 명 남기지 못하고, 수묵화의 풀과 암연에 국한된, 정치인들과, 부활하는 배삼룡과, 이데올로기로서의 위안부와, 런닝셔츠맨 호주에 가다의 아베와, 거칠고, 마감이 덜되고, 주자를 희롱하며, 코딱지 같은 카바이트에도 마땅히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환경부의 헌법 초유의 사태를 계속 방관하는 것으로써 국가 전체가 더렵혀진다.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는가 할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걸쳐 거의 대부분의 권력적인 대사들은 단 하나의 理도 뚫지 못하는, 바보 멍충이 같은 이데올로기들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미가가 있었다. 문명과 생각은 발달하지 못했고, 성경만 우선할 때였다. 쌀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그나마 시즌의 사성제를 달성했다고 하나, 쌀을 보다 확보하기 위해서 관념으로 가능한 숱한 피어싱류의 의식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주먹이 법보다 빠른 것처럼, 쌀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빠른. 그것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아는 척이란 정말이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종교도 아니고, 카바이트 소리도 아니며, 문학도 아니다. 농부의 어둔 눈. 하늘 아래 지농사. 누군가 끊임없이 아는 척을 하는 우주 안에서, 밥을 먹다가, 밥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십자가는 아름다운 거리와 같다. 바울이 갇힌 바가 된 것이 십자가보다 낫고, 십자가가 팔다리가 없는 것으로 지내다가 튀겨지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십자가는 보다 나은 것이다. 우리가 서점과 음반 가게를 아는 것처럼, 홀로 돌아다니는 사람의 경제 같은 것을 확보하는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가 고통스러운지 안 고통스러운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불규칙적으로 터지고 있는 카바이트처럼. 카바이트가 터지자 어머니에게 짜증을 부렸는데, 잠시 소강상태가 되는 것을 기뻐하여 어머니께 전화도 하고, 그런데 다시 지금 11:16분 터지고 있다. 그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중에는, 전혀 다른 십자가로 인해서, 안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집의 위치와, 신체, 깊은 잠력 등이 부럽다. 그리고 원시적인 땟국물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괴물 같은 영어로 몬스터 카바이트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