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류의 이광수 연구의 역사적 필연성과 가난한 한국 학생들의 영양소 결핍........
우리에게 찬란한 아버지의 직접성을 갖기란 것은 시쳇말로 좀비, 다시 말해 어려운 것 같다. 문명은 문명개화, 아침에는 아사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채널을 갖고 있다. 민중들은 뼈빠지게 일하고, 저녁에 잠을 자고, 겨울에는 바깥에서 안주 먹고 집에 와서 큰 공기에다 밥을 먹고 남겨서 나머지 식구들에게 먹인다. 이광수가 이런저런 동학 사무처장을 한 것이 어째서 작품 속에 반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척결당한 동학군들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생존과 여진이. 그러나 이광수는 형식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설을 쓴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그에게서 날카로운 신식 건물의 회랑이라던지, 집강소의 너른 풍경이라던지, 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작은 집의 서재에, 손님들이 늘 찾아오는 것만 보이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일 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고 거수할 수 있는 직접민주제들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사회적인 편지풍파가 심하면, 돌아와서 리듬엔 블루스를 듣는 것을 선호하는 서울 멋쟁이들이 많았지 않은가? 학생 운동 하는 사람들도, 빌리 홀리데이라던지, 마일즈 데이비스라던지, 호산나라던지 하는 음악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영화 덥석만 놓고보더라도, 사람들은 다만 키취의 사랑 소설이라고만 여기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정신권과 운동권의 통신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광수의 소설이, 납북작가, 혹은 친일작가로만 낙인 찍는다면 우리는 잃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것의 노골적인 재즈와 블루스가 염상섭의 삼대가 되겠지만, 이광수는 자기와 비슷하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도리어 뛰쳐나가는 형국이다. 그에게는 선생님으로서의 살아숨쉬는 심장이 있었다. 김윤식이 되도 않는 전기를 갖고, 작품에 대한 전기적 비평을 행한 것이, 때로는 사회물리학적 비평을 행한 것이, 김형식을 닮은 이광수의 작품의 면모를 상해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잠깐 보는 동안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불편하였다. 불편하다고 아프지는 않는다. 대신에 아프면 불편해진다. 문학 그 자체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파괴적이고, 역사초월적이며, 원시적이며, 존재론적인 인간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이 한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김윤식류의 작품 비평을 읽고 도무지, 도모지라고 사람을 숨을 쉬지 못하게 해서 죽이는 잔인한 방식이 있다고 한다, 이광수의 작품을 높은 선반에 둘 수 없었다. 비평과 해부의 대상으로 놓는 눈치와 얼치기 상태. 상대방에 대한 페이트리어티즘 혹은 클레스콘셔스니스를 파악하려고 할 뿐이었다. 모든 이가 그 시대에는 그와 같은 페인트 모션칠이 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 운동권은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모르나, 과학혁명의 키취를 높이 들었으나, 그것이 아주 단순하게도 학생 창작 자동차 만들기도 하지 못했었다. 과학 중에 과학은 집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울 회사원이 아닌가 한다. 잘 버무리면 뭐든지 할 수 있었으나, 우리는 안으로는 의료진이 없었고, 밖으로는 김윤식류의 소주를 많이 먹다가 그것이 원인이다 과감하게 적발하지 못하고 거리에 가로등불이 쓰러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김윤식 그 자체는 삼세대 변모를 잘 행하고 있다. 그리고 젊었을 때의 작품론을 불완전하게도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젊은 문예 이코노미스트들에게 그가 이광수를 해부하는 단 하나의 아버지로 군림했었다는 것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대단한 국어주의자인 경우, 단번에 이광수를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윤식류의 비평을 가끔 다른 사람들을 비평하는 것으로 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흘러, 염상섭의 삼대를 읽고는 너무나 잘쓰여진 소설이다고 손뼉을 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제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누구인가 하는 내용을 읽었다. 의궤8일이라는 다큐멘타리가 끝나고, 정신이 맑아져서, TV를 계속 보게 되었는데, 기분이 잡치고 말았다. 마치 김윤식류의 연행처럼, 문장 하나에 심판의 혈기를 담지 못하는, 에스겔에서의 어떤 내용처럼, 저마다의 신 앞에 향불을 피우고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렸다 하는 말만 중얼거리는 듯 했다. 그러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뒷심을 발휘해서, 민중들의 공공의 문예의식이 애국가를 만들었지 않았나 하는 서지학적 접근으로 결론짓는 것이 내가 늘 말하지만 안도현의 한숨을 쉬게 하였다. 그럴 것이다. 안창호가 미국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애국 정신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회의. 김구가 중국에서 중국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으면 과연 독립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실험 정신. 윤치호가 한국에 있어서, 프레셔가 분명 그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남달랐다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암시. 그 모든 것을 피해가는 슛이기 때문이다. 그 문건들이 고맙고, 그 사람들이 고마울 뿐이다. 셋 모두 우리들의 삼육대학교이다. 그리고 매우 직접적으로도, 윤치호나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것 같지 않다.
기억이 가뭇가뭇 나는데.......
신라시대 때에 매염방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중국 여배우가 아니다. 이름이 같고, 한자는 다르다.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훗날 김소월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소월이 가다가, 잠을 잤는데, 그곳이 젊은 학자 매염방이 잠을 자던 곳이었던 것이다. 소월이 깨어 일어나 자유로웠던 과거, 성경 시대의 한반도를 그리워하면서 작사를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사람들 듣기에 좋았었다. 그런데 방금 생년월일을 찾아보니, 애국가의 처음 가사를 쓰기에는 너무 어렸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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