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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가진 자들의 잔잔한 폭력적인 사각형으로서의 드라마와 야훼의 순정

by 마음대로다 2012. 8. 29.

가진 자들의 잔잔한 폭력적인 사각형으로서의 드라마와 야훼의 순정

 

 

 

 

 

 

 

 

 

내가 바로 죽는다면, 사람들은 선한 사람의 하루살이 서늘함보다는 좀더 오래사는 귀여운 악당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 사흘만 살아도, 사람들은 무엇이 분명 나쁜 것인지 지목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시험지가 프린터되어 들어오는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조이스틱이나 조이홀을 만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의 징표일 뿐, 우리가 그것들만 보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다만 이 아름다운 사회의 생활을 하나도 하지 못한다는 증거로서의 몇몇 표적 같은 드라마적인 웅변이라는 것은, 매우 우리가 격심하게 바라보는 사태인 것이다. 사각형은 처음에는 변수가 많지만, 그들 같은 인간형들에게는 나중에는 그냥 작은 일에도 무조건 싫은 대상이 되기 싶다. 교정원이나 정신병원 같은 데에서 사회성 훈련도 받고, 재취 훈련도 받고, 해서 돌아와도, 그 옛날의 중앙고속의 심볼처럼, 심폐기능과 대사기능이 극심한 마비증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니 몇몇 표적드라마가 매력적이지도 않고, 그들 자신에게 우호적이지도 않는데, 어떤 안정적인 스페이스를 제공한다는 명분 하나로 자기 무거운 중력을 띄워서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것조차 사라지면, 노다나 겐바나, 참의원이나 하는 것들이 지금 행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들은 화순 온천의 입구 조형물인 티라노의 양대 세력의 지배를 꾀했지만, 태풍이 과하게 몰아친 것일 수 있다. 그런 태풍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 동양삼국의 공통된 의견이 아니겠는가? 고생하는 순정. 애국적인 순정. 모든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순정 부품이 있듯이. 사랑의 순정. 노동 운동의 순정. 항상 독도처럼 어딘가를 꽉 쥐고 있어야만 정신이 집중되고, 사회생활을 하고, 업무를 보고 하는 것이다. 늘 잔잔한 폭력적인 사각형으로서의 드라마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 부쩍 일본풍의 드라마가 유행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말은 항상 잘난 척 상스럽고, 도저히 제거가 되지 않는 모양, 사츠진 지켄은 드라마의 실효적 지배 아래서 마치 미친 년 치맛자락처럼 펄럭거린다. 그것은 진실이고, 기관이다. 군인의 순정. 우리 국군의 육군 규모를 줄이겠다는, 뭐 나로서는 나를 상정하는 높은 지휘관적 제스쳐는 참 잘하는 짓인 것 같다. 무엇이든지, 무슨 말이든지 권위 있게 하는 것이 도덕을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히카리가 되지 않겠는가? 내가 오늘 죽는다면, 그들은 귀여운 악당이 되겠지만, 다시 일주일을 산다면,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늘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진실이었다는 것 밖에, 멘틀과 지진과 직접적인 길항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뉴스거리들이 육십분 분량 중에 잘하면 사십오분이요, 십오분 분량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제정신이 돌아온다는 것은, 유적 판단으로서, 모든 인종의 결합을 필연적으로 상정하는데, 그것이 바로 야훼이다. 방법은 다만 방콕이나, 방글라데시, 방법일 뿐, 방이 온돌인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고, 바깥에서의 모임을 하나님의 전문적인 이름으로 갖고 있는 나라도 우리나라 밖에 없다. 혼자서, 문명과, 더러움과, 다만 형태만으로 존재인 것처럼 찐득거리는 것을 탈출하기 위해서, 벌판으로 나가 죽고자 하면서, 아주 조금 순정으로 돌아오고, 뇌성마비 같은 어린아이 때의 친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여유가 있을 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이것마저 영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