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쌍계사의 억지 하모니
먼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추적자. 그것은 가을 추에, 물방울 적, 그리고 시대적 스승을 높여 부르는 이름으로서의 자. 추.적.자. 이 말들을 이렇게 쌀알을 던지듯이 말해도, 사람들이 먹어주는 것은, 그렇게 침입해서, 차갑게 버려져 있는 집을 온기 있기 없기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개그콘서트는 이방과 상방들인데, 사람들의 고혈을 모기처럼 빨아먹는 종래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래방과 찜질방들로서, 있는 힘을 다해서 누군가 흘리고 간 음료로 끈적거리는 계단을 닦고, 버려진 빈 사무실을 애잔히 돌아보고, 고양이가 간판과 건물 사이에 떨어져 오직 소리만 낼 때, 한 두 사람이 그 이틀 됨과 사흘 됨을 알고는, 방송까지 된다는 것은 일주일 됨일 터인데, 마침내 방송권력을 힘입어 전문가와 소방소에서 사람이 와서 움직일 힘도 없는 고양이를 구하는, 학생들이 정신의 독재자처럼 지나는 거리에서, 그런 이방 삼방들은 반쯤은 학생이고, 반쯤은 윤락 업소의 장국영과 임청하는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백일주로서 마셨고, 임청하, 나는 이렇게 맛좋은 술이 있는가 친구들에게, 발음이 묘하게도, 혹은 발성이, 아무튼지간에 센텐스가 나의 문학적 감상의 진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다. 다시 햇빛이 든다. 사는 것이 이렇다. 우리의 형이상학은, 형용사에 의지하는 것이 많은데,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기능이 있는 에이도스에 이르러서는 명사를 부수는 참 형용사가 요청이 되는 것이다. 비가 온다고 의탁할 것이 아니고, 햇빛이 든다고 기조나 주제를 바꿀 것이 아니다. 사람이 고양이 되는 것은, 그리고 쓸쓸함에 어쩌면 억지로 빠져드는 것은, 이와 같은 형용사의 광파적 상태에 미쳐 그럴 수가 있다. 한국이 있기 때문에, 쓸쓸한 고양이 같은 쌍계사가 있는 것이다. 만일, 만약, 한국이 없다면, 쌍계사가 한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것이다.
티아라. 뚭뜨뚜루루. 뚭뜨뚜루루......
우리는 영혼이 있고, 우리나라에 영혼만을 갖고 장광설을 펼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객관성은 되나, 모든 감각의 구할을 차지하는 애국심의 토대, 그래서 정치인들이 때만 되면 간을 빼먹듯이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 객관화시키고, 거리를 조정하고, 분명하고 엄격하게 명사와 형용, 형용사라 안했다, 심리적인 말투와 단호한 단독자가 되겠다는 선언이 없고, 다시 말해 국문학적 문건으로 그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깊은 홍콩 영화 감독 추문회인 것이다. 청년들은 무조건 청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바지는 외국 것은 비싸고, 옷가지가 많은 것으로는 그것의 한 종류가 된다. 그리고 지식산업이 뚜렷한 경제적인 호불호 속에서 팽창해서, 사람들은 옅어져서 양복을 입었다. 이 말은 한국어로 엄격한 것이다. 번역할 수가 없다. 옆구리가 터진다는 것은 다만 심리적인 표현이다. 맥락이 없고, 그것과 호응하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말을 방관하고, 동조도 하고, 멍청한 것들을 앞에 두고 웃기도 하면서, 우리는 삼사 년 가량을 지냈다. 시간은 과정이다. 동시에 존재이기도 하다. 민중이 천하다는 것은 오직 그들의 모습에 인사이트된 것이다 할 수 있다. 돌아보면, 사람들이 이웃도시를 갈 때 처녀가 두려움으로 가고, 부모가 자식들을 염려하면서 가고, 학생이 대학을 다니고 싶은 마음에 간다 할 것이다. 그것들은 떠들고, 웃고, 배드민턴 치고, 피디와 에프디, 작가들과 조명들, 그것들과 탁구치고. 더 이상 말할 힘이 없다. 그것들은 나이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내 가난한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의연금을 수집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들이 지옥에 가는 확률이 높지 내 소원이나 좋은 마음에 합당하려 하겠는가? 한국이 있으니까, 쌍계사가 있는 것이다. 한국은 옆에 한국이 있어도 한국이 되나, 쌍계사는 자기가 한국이 있어서 쌍계사가 된다는 가을 날의 스토리를 좋아한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짭잘할 것이다. 이것도 어떤 외국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우리는 수입이 짭잘한 것을 짭잘하다고 한다. 영혼이 지독한 한국의 굴레에 빠져, 듀카티의 차원 너머 말린 오징어의 흰 색의 염분처럼 되는 것이란 우리나라가 세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나가수에 소찬휘라고 있었지 않은가? 대개의 공부만 하는 여자들은 높은 발성이 요구되는 노래는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 아무 것도 없는 우주에서는, 인접성의 꿈의 방식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짭잘하게 놓여진 영혼이 소주로 변한 것인지, 묘한 만족과, 비주얼한, 그리고 잘 모르는 강원도에 사는 오춘 아저씨의 취기도 오르게 한다. 공부는 모나드와 모나드로 하는 것인가? 군대는 모나드마저 멋진 벙커 같고, 참 영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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