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서양 정신사에 관한 한 강의: 하이브리드(2010)
중국을 무시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서양에 가깝고, 생각해보면, 일본도 적극적으로 서양에 가깝고, 대만도 마카오, 인도지나반도, 중국은 사마르칸트와 캘커타를 옆에 두고 있다?? 중국은 서양을 우리보다 마테오리치,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하멜 표류기나 있고, 그것도 근대의 것이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으로만, 나중에는 그래도 유엔참전이던지, 언더우드 아펜젤러, 할린데에?가 왔지만, 가을 하늘 공활한데의 가운데 중심점에서, 티비와 영화를 벗어난 차원의, 뭔가 메시브하고, 어떤 터닝 포인트 같은 과거 역사속의 서양과의 교류는 없는 것이나 진배 없어 보인다. 얼마나 서양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으면, 민중들 모르게 임진왜란을 벌이고, 화란에서 수입된 조총으로 총알을 한 번 맞아보는 영광을 누렸겠는가? 고노간지. 이 말은 어쩌면 임진왜란 때에 건너간 한국어의 한국어 한 마디였을 것이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미안하고. 교류는 허구하나, 없는 자리에서는 많은 부분 실재이니까. 주자학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 주자를 쉽게 쓰나, 상인들은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자와 보자기를 둘러싸고 던진 뒤에, 그것 중에 행여 어느 것에는 독이 든 것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시스템창호, 병렬진법, 잘 모르는 말로서의 학익진으로만, 오직 자기 기억의 연결로서만 주자학적 그림자를 잡아보는 것이다. 상인은 에이도스의 지배 아래, 독재, 누구보다 맑고 명랑하기는 하나, 주자학은 상아와 같아서, 결코 섹스로 유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벌써 방정식을 잡았을 것 같은데, 사물은 팬시하게, 보다 많은 시간 동안 유무의 사유적 진행을 하는 편이 낫지, 학제다, 제도다, 지경부다, 교육 시스템 창호다 하면서, 총장이다, 개편이다 하면서, 시덥지 않은 유사 교육적인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는 자기가 무엇이 되기 보다는, 남들을 대표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아니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신과 조건이 이와 비슷하다. 가면라이더나 시공전사 스필반이 아름다운 것은, 새롭게 아름다움이 첨가되었는데, 갑자기 현대 사회 속에서 비등해진 연구집단마저도 귀엽게 보는, 단호한 아크 임펄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쫄게 되어 있다.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자기 폭력의 지도 때문에. 물론. 폭력은 외적이며, 실제이고, 집단은 확고부동, 유동하나, 마음은 평안하고,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새벽에 아포판시스? 하신 뒤의 말씀처럼, 우리 하는 일은 소소하며, 친구들은 제법 의롭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하고 싶고, 폭력 군주가 되고 싶은 저 깊은 마음 속의 간주관적 욕구. 주관이면 반드시 탈각되나, 사람이 매운 냄새를 맡았다고, 자기가 매운 맛이 날 것이라고 착각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분명 간주관적인 것인 것이다. 일정 시간 지낸 뒤에 주관을 획득하는 타임을 한 두번 겪은 뒤에, 잊어버리는. 잃어버리는. 모나드....... 중국이 쳐지는 것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쓸 데 없는 정신표현적 문화론적 운명론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서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교류가 활발했는가? 별로 활발하지 않았다. 다만 서태후 놀이, 서황모 놀이에 깊이 심취해서, 지식의 비쎈샤프트에 관한 개인과 집단과 학교와 연합과 또다른 집단과 서원과 성균관과 홍문관, 대학과 대제학, 북로군정서처럼, 따로 또 같이, 함께 혹은 혼다, 그렇지를 못한 것이다. 그것은 잠깐의 빛처럼 사라져간, 무협 놀이에서도 증명된다. 중국인 학자 왕문탁씨가 그런 말을 했다. 중국인들은 비판을 여간해서는 잘 하지 못하고, 반드시 인생에 한 번은 잘못을 저지르고, 누군가에게 맞고는, 그것을 평생 트라우마로 살아가는 뇌막을 가졌다고. 나는 그 말이 너무 독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요지는, 서양의 현대 문명이 중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 말에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유명한 인기 작가 무슨 코드 쓴 사람, 다빈치 코드, 그 사람의 비판적인 열혈 독자인 서양 학자, 뚜렷한 직업이 없는, 데이빗 휴미드는 이런 말을 영문학 학술지 시카고 포춘지에서 했었는데, 작가는 기사들을 한 사람도 만나지 않고, 기사들이 있다고 없다고 하는 소설을 쓴 것이 깊은 잘못.페일려라고 했다. 비판적인 성격이란 것은 내외적인 것으로서, 영문학의 전통에서는 원더러가 기본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영문학은 자잘해서 헤겔의 정신성 같은 높은 주장을 하지 못해도, 스코틀랜드의 중소 캐쓸들처럼 긴가민가.빌리브오아낫니스,는 꾸준히 유지시킨다고 했다. 예수의 후손이라는 것은 운동적인 성격으로만 보면, 사람이 자기의 우물물을 멘틀까지 파들어간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용병으로서 죽거나, 함께 싸우다가 정신이 아니라 데라니온으로 기사 다섯 중에 셋이 떨어지면, 둘은 데나리온이 되겠는가? 기사가 되겠는가? 고민하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분유하고, 해치되면서, 아름다운 프로일라인을 얻거나, 자기의 개인성을 원더러 같은 결여적 패턴으로 증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이상한 이진들을 계속 연결하고, 철학이 없으며, 아낙들의 긴가민가. 빌리브오앗낫니스를 그대로 습윤하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했다. 나는 그 논문이 그 해의 영문학 논문대상을 받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로 대단히 명쾌하고, 증명하고, 거론하는 다른 텍스트들은 사람들의 눈을 보다 선명하게 하였다. 대신에 그런 무슨무슨 코드 같은 것이, 말이 오토바이가 되어 있는, 미국의 한 주유소 매점의 문고본으로 팔리는 시츄에이션은 충분히 생산적일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결코 나오지 못했다. 이런 말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외쳤던 자끄 라깡이나, 프로이트 만능주의로 중심을 놓고, 다양한 변주의 공식을 제안하는 후대의 정신분석학자에게는 큰 문제를 야기하겠지만, 서양 정신이 지금 거의 전부가 나오지 못하고, 하이브리드 같은 데에서도 함께 침몰하고 있는데, 그것이 다만 하이브리드 같은 것도 만들지 못하는 민중 때문이라고는 논리학적으로 추론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지금 살고 있어도, 나오지 못하고, 그의 가르침이 후대에 영향을 미쳐 소중한 지적 유산이 되었어도, 그들도 나오지 못한다. 기사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베오울프의 양명학적 포인트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오울프가 괴물과 그의 어미를 죽인 뒤에, 자기도 함께 죽어서 타오르는 장작에서 산화되었는데, 그것은 해석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상식적인 범주로서는. 프로이트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문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베오울프의 도움 때문이 될 것이다. 그것은 기쁨의 연속. 괴물도 기쁨이요, 그의 어미도 기쁨이며, 기사는 기쁨의 정장이고, 화려하고, 강력한, 왕과 공주, 여러 생각 없는 양민들을 돕는, 장작들이 캠프 화이어를 하는 것은 저기 이란 근처의 조로아스터교의 고향 같은 것이다. 환자를 상대한다는 것. 범인을 상대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오지 못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같은 영원 속의 미궁 같은 것일 수 있다. 중국도, 난다또, 나오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나와서 야한 영화나 찍는 것은, 또한 문명이나 문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인들의 반야지처럼, 재빠르게 연결되면, 평범한 사람들의 성적 횟수에 닿을 수 있고, 거기서부터는 모르는 것들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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