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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시니피에는 한국어인가?

by 마음대로다 2012. 9. 2.

시니피에는 한국어인가?

 

 

 

 

 

 

 

 

공통분모로서의 우리는 나약하고, 모습은 삼각형? 아니면 원형? 그것의 나약한 스케치 그림. 햇볕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따갑다. 문명의 하드코어는 신속하고 정확하나, 누구를 위하여 링더벨 하는지 모른다. 누군가 한 턱 쏜다는 저녁 그림은 링더벨한, 팅커벨 쓰고 싶은, 막연한 연속과 쓰스까무시의 변천 속에서 잠깐 시황제가 되는 것일 것이다. 경제가 늘 실내 사격장 같으면, 우리는 자격증이 있으나 없으나 야마하 오삼공을 한대씩 가지고 있는 천국 같은 대학촌에 사는 것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뿌리고 가는 돈과, 젊은 학생들이 내뿜는 열기, 그들이 온 몸에 두르고 있는 디자이어는 이미 죽음이 약정된 상태이나 내일 당장 죽는 것은 아닌 장년들에게 소중한 기억과 마음의 햇빛이 된다. 그것들을 상대하는 팬시와, 그들이 오가는 상점과, 그들이 빈약한 노트를 구입해서, 필기해 들어가는 시간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민중에게 약속하셨던 불구덩이 같은 천국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학에 환장한 나라가 된 것은, 중국산을 짝퉁이라고 욕하면서, 매도, 우리나라의 짝퉁 대학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면서 방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최루탄과 피를 거리에 많이 쏟았기 때문이다. 전경들 중에도 대학생들이 있었지만, 비교적 출신이 종합적이었다. 가장 가슴 아픈 추석 전후의 삽입하는 그림이, 전문대학 출신자의 취직 성공률이 높다는 보도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부추기는 것일까? 아니면 바나나시키는 것일까? 방정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부추기는 것. 하나는 바나나는 것.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와 바나나를 발코니에 세우고, 누구를 명절 기념으로 석방시키고 싶으냐고 하니까 사람들은 방정식의 바나나시키는 것을 선택한다. 전문대가 취직 성공률이 높다는 것은 아주 예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물이 다음에 무엇이 되는지는 모르는, 결국에는 바나나티비를 모두가 보는 다음의 하늘 같은 모나드의 크랭크인 하는 소리, 그것의 의미, 가을하늘 공활한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두고, 무섭고 사납고 공활하다고, 바나바나를 석방하라고 외치던, 그러니까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군중 심리가 결국에는 우리인 것이다. 전문대를 나와도, 교양 수업을 들어야 하며, 대학은 저마다의 크기에 불만을 가질 수 있으나, 전문대생이 사년제 대학을 다니는 것의 크기만큼 실질적으로도 더 이상이 불필요하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면, 지금도 매우 큰 것이다. 대학에 없어도, 나는 수많은 아름다운 여학생들과 통신하고 있고, 대학에 있어도, 사람들은 천성이 마담뚜의 시선과 매개의 오성 밖에 없는지 러브스토리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배움의 연짝은 가능하다. 늘 옆에 앉고, 수업이 비슷하고, 취미가 같고, 둘이 다녀오는 것처럼 사진 동호회의 출사를 다녀오고, 마음의 가을 갈대처럼 그윽해져서, 둘이 영화관에서 사람 인자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저녁을 성수할 때, 둘이 서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에 잠이 드는 것을 저항하는,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데, 친구가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착각해주는. 그것의 아름다운 합성 상태. 정신과 육체의. 확률적으로 경상대를 가면 어렵게 되고, 이공계를 가면 재벌들의 만남 같이 비치고, 공대나 자연과학대를 가면, 미생물들을 배양하면서 잠깐 불꽃놀이 같은 저 먼나라의,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책과 같은 가상적 친근성에 입회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창피함도 없이, 뉴스가 된다고 하고, 착해보이는 얼굴이다면서 그냥 그대로, 무한 반복적으로 뉴스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취직율의 마법에 걸리고, 한달에 한번, 마법에서 깨어나면 좀더 진취적인 생각을 하느냐?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마법은 오직, 걸렸다는 걸려 들었다는 상호 낚시 미늘적인 시간성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강건하고, 모임의 분위기는 활기차며, 그것의 저변을 흐르는, 고도리 새들처럼 지나가는, 신현균의 공장신학을 아낙사고라스의 부분균질체적으로 긍정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의 문제는 또한 의외로 하나인 것이다. 최직율이 높으니, 전문대학에서는 교양 수업을 등한시하겠는가? 개인적인 의지가 안생기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취직율이 조금 떨어진다고, 대학교에서 교양 수업이라도 더 철저하게 하겠는가? 개인적인 열기를 그나마, 그 무한한 주관철학적인 시간을 잘 이끌어주는가? 보이지 않는 모임에서라도. 아니지 않는가? 그것들은 대개 위선의 화살들이며, 나의 대학교에서의 교육됨은 출처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는 것들이, 나중에는 토하면서 글을 쓰고, 그것을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옛날 영화들이, 지금의 나의 높은 관점, 사람들의 유행적 관점에서는 포착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본이건 한국이건 간에 왠지 모르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 공부를 그렇게 했고,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과 경쟁하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번의 자기 비판이 없었던 것이 아쉬움이지만, 너무 민중적인 인정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적 저변의 기성 공동체와의 합성이 개인적인 예술적 의지와 만나서 좋게만 발전할 수 없는 것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니피에는 한국어인가? 인간 매질의 에이브이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내가 명명한 시니피에는, 서양 철학자의 개념이 아닌가? 그러나 이 말에 이미 답이 있다. 에이브이 대전에서 승리하면, 모두 직접적으로는 나의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것이고, 동양, 그리고 이 작은 나라에 다 데리고 있을 수 없으니 우리의 것인 것이다. 사람들이 에이브이 대전에 들어가면, 반쯤 미쳐 간다. 그러다가 완전히 미치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 것은, 그것을 두고 영화찍는 줄 알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민중 영화. 생각이 시니피에 조금 예민한 사람은 예술 영화. 햇빛은 따갑다. 그것의 슬픔을 어떻게 더 담아낼 수가 없다. 최근에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전화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명제를 하나 상기했는데, 예술은 자연의 모사이다 하는 것이었다. 철학이 명제로 구성되어 있고, 개념, 그것의 경험적 근거나 구체적 결과를 하나의 점과 일정한 거리로 이뤄진 선의 집합 같은 원으로 상정할 수 있다면, 문답법이 아름다운 플라톤 철학은 하나하나 배우기 위해서 엄청난 거리를 걸어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근대 철학을 공부하고, 고대 철학자들을 단순하게 여기는 것은, 지금은 조금도 그렇지 않게 되었지만, 최근의 철학적 분위기에서도 그러한 것은, 근대 철학도 힘들어 죽겠는데, 고대 철학이 왠지 모르게 감각되는 대로, 지금의 세련된 문화 현상과 감각의 순자적 패턴을 예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예로 들어도, 맑스주의 비판 사상을 경제건 문화건 정치건 간에 장쾌하게 발설하는 것을 무슨 개짓는 능력으로다 권장했고, 그것은 발성의 시간성과 지면의 자기 능력을 보장하는 것으로는 틀림 없었으나, 조금의 부유와 아무런 터치가 없는 신흥 언론 계급적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렇게라도 누군가 구속해주었으면 하는 링링한 상태가 불어닥치고 만 것이다. 한국이건 북한이건, 중국이건 간에 우리 마음 속에는 내 안에 너 있는 것처럼, 일본 우파가 있다. 일본 우파는 순전히 공간적인 의미를 갖는다. 좌파면 그나마 한국과의 관계적 지식성이 엿보이지만, 별다른 태평양 철학도 없는 주제에 우파 우파 하는 것이면, 뭐 하자는 것인지, 일본인들 스스로도 막연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것의 어원을 두고, 이데올로그가 어떻고, 프랑스 나폴레옹 시기에 우파와 좌파가 어떻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지식이 가상하긴 하나, 그것도 뭐하자는 짓인지 알 수가 없다. 사유재산제만을 갖고는 사람은 비닐 이십원짜리 하나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 이것은 의외의 보도이다. 반대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사람이 경계가 없고, 말은 따로 할 수 있어도, 말이 없는 밥을 먹을 때 두 입으로 먹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국가가 수백년의 대계가 있지 않으면, 그와 같은 의식은 다분히 소설가적인 것과 같은 어깨의 것이다. 숨어서 라디오 듣고, 티비 보고......

 

시니피에는 한국말이 아니다. 서양 사람, 프랑스 사람들이 먼저 썼다. 그러나 한국말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애국하기를 좋아하고, 고전을 사랑하며, 성경 읽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그런 말이 있대지 않은가? 한반도의 사람들은 매우 시니피에 해서, 춤추고 노래하고, 책 읽고 떠들고, 가을날 깊어가는 저녁 날에도 차를 마시거나 도수가 높지 않은 술을 마시기 좋아한다고....... 수십 잔의 소주와 막걸리는 그래서, 어느 정도 민중의 거울에 가깝다. 개념이 부정확해지고, 독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술을 깨고, 시니피에는 한국말인가 상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왠지 골치가 조금 아프고......

 

사람들이 엔에스윤지라는 독립 가수를 보고는 다소 흥분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리릭은 저열하고, 주제는 하찮으나, 존재와 그를 둘러싼 산업이 싱그럽기 때문이다. 조금 앞서가는 것도 시니피에이다. 늘 우리는 상상하고, 하늘의 별빛만을 수천년 바라보던 첨성대처럼, 문학에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