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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빛나거나 미치거나: 인문학적 전후애로서의 파미르적 고원을 추적하는 시간기계.......

by 마음대로다 2015. 2. 17.

빛나거나 미치거나: 인문학적 전후애로서의 파미르적 고원을 추적하는 시간기계.......

 

 

 

 

 

 

 

 

나는 군대에서 체력을 강화시킨 다음에, 막노동도 열심히 해서, 돈도 벌고 자립자강할 수 있을 걸로도 생각했다. 시간이 없고,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나는 저녁 늦게 도서관 휴게실에서 여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부주의자가 되었겠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 체력은 다시 오간데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워낙에 공부를 지하철의 궤도처럼 철저하게 하니, 군대에서 엔진이 튜닝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은 있었다. 햇빛이 우리 사는 세상에는 많다는 것. 그것을 배운 것은 틀림 없었다. 그리고, 좀더 체력이 좋은 상태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실제 시력이 아니라, 어문학적으로, 시력이 좀더 명확해진 것이 있었다. 다만 그런 것을 배우기 위해서 군대가 있다고 한다면, 수미상응, 업사이따운, 주객전도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군대는 군대일 뿐. 오해하지 말자. 처음에 개그맨들이 외쳤던 것이 그것일진데, 그러나 마침내 업사이따운이 되고 말았다. 결과는 두 가지이다. 사람들이 공부를 끌려가지, 결코 주동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가진 게 실질적으로는 별로 없다보니, 군대를 성공적으로 다녀오는 인문학생인 경우에는, 마치 천금을 얻어가는 것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군대가 무슨 국가 화랑 교육 기관으로 달바꿈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훌륭한 문학도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와서 배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없다. 매일 같이 점호하고, 매일 같이 구보하고, 매일 같이 뺑이 까고...... 다만 다르다고 한다면, 양구, 눈 앞에 당장 보이는 풍경의 실제와, 내가 뿌리고 다녔던 마음과 문장의 염 뿐이다. 얼마든지 동료애가 생기고, 얼마든지 자기 생각을 버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군복을 다려 입지 않았다. 다리미가 어떤 개그맨이 승마를 숨막히고 하면서 운율을 맞춘 것처럼, 내게는 다리미가 철제고, 뜨겁고, 그렇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선임이 다려주는 것은 좋아했다. 선임은 따로 하는 일이 없이, 그와 같은 보충실을 자기 사무실 삼아 지냈었다. 나는 그에게 두 차례 정도 옷을 다려 입고, 내가 내 것을 다려입은 적이 없다.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책을 읽다 보면, 나는 그것을 재산을 하늘에 맞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누구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도, 시간이 훌쩍 지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완도에서 보길도를 가는 길과 같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인문학도가 수필의 여정으로 마음에 품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마음이 불안하고, 부자유한 생활 처지가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문장이 처음으로 소프트하다는 것을 거기서 알았다. 나는 가기 전에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신학과에 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택시비 더블처럼, 거기서 diablo 알게 된 것이다. 옷을 다려 입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그린슬리브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누군가 인간이 앉을 수 없는 테라스의 난간에 앉아, 책을 그렇게 읽으면 십몇 년 정도가 지나 나처럼 고통스러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일단 그때는 지금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을 넘겨버렸을 것이다. 더구나, 책은 아름답고, 내가 갈 수 없는 여정의 끝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이 반도체의 집적대는 집적회로이긴 하나, 그것의 정자에서의 네 기둥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캠퍼스에는 교회가 있었고, 학도병들이 돌아가면서 공부하는 곳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남들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일을 많이 했고, 그런데도 하늘에서 보급품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단장이 지나가면, 경례를 하기도 했었다. 다 잘 모르는 것들이다. 술어적 속성이란 그렇다. 사람이 끊임없이 말이 많은 것이고, 웃기기에 지지 않는 것이다. 나무막대 두 개를 철사 망으로 이어서, 우리는 당까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대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침 일찍 창고에 가서, 삽 네 자루, 당까 여섯개, 그렇게 기록표에 적고 가지고 나왔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속성으로서의 순자적 미덕을 말 그대로 빛나도록 갖고 있다. 그것의 몇 개의 구슬은 내 마음에 쏙들고, 많은 점수를 얻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나는 군대에서조차 문학을 수련하였는지 모른다. 신학과 문장이라고 한다면, 너무 말이 많은 것이다. 그냥 문학이라고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군대는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째서, 바람이 부는 대로, 내 자신이, 혹은 그것을 하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일까? 죽은 사람은 말을 잘 듣는다. 정말이지 죽은 사람은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간다. 귀가 있기 때문에, 말을 잘 듣는다. 그들의 생명은 감추어 있다. 그들의 연인은, 그들의 가족은 감추어 있다. 그들의 가족이 군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은 예법처럼, 동해안의 황태덕장자의 옷자락을 밟는 것 같았다. 늘 언제나 그것의 레이디스코드는 서로 잘 맞는다. 군부대 아파트는 멋지게 있었다. 주변의 식당이며, 가게들도, 나름대로 군기가 들어 있었다. 내가 배고프고, 힘들어서, 더더욱 도드라지게 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겨울에 면회자가 있어서, 아침 일찍 자대로 복귀하는 인문학생에게 그것의 조용한 절창은 이루 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어떠한 한국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였다. 왜냐하면, 하명중, 남기남, 이명희들은 묘하게 막걸리의 클리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걸리는 일종의 제임스 본드 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을 서로 붙여주는 기능을 하였다. 그것들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있다보면, 사실 집도 절도 사라지게 된다. 어차피, 극장에서 막걸리를 먹고자 하면, 비슷한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요된 이년여의 강원도 여행길에서, 앙드레 가뇽의 뿔피리 소리와 함께, 나는 나만의 동토의 왕국을 보는 듯 하였다. 산소가 많아서인지, 빛깔들이 유독 희고 환하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데, 굴뚝에는 연기와 함께 김이 진하게 피어오른다. 그 안에서 얼른 나는 패배한다. 나는 패배주의자이다. 모든 문장이 그런 할아버지 시계이다. 그런 나를 두고, 최명길이 아니라고 한다. 저녁에는 이보희가 다녀간다. 물론 둘다 한창때이다. 나는 더더욱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을 만날 심산으로 문학지까지 발간한다. 이름은 폐백이다. 나는 아름다운 일제 자동차까지 선물 받고는, 서울까지 다녀온 다음에도, 문학적 의지를 거두지 않는다. 그런 나의 상상의 문학지 '폐백'을 옆으로 하고; 나는 계속해서 자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좌청룡 우백호, 좌포대, 우민가의 아름다운 복귀길을 묘사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