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놉의 딸(2015): 나의 유일한 장편 '음악헌정'이 갖는 무자비성 속에서의 해방 신학......
사람들은 자비가 있으면 좋아한다. 그것은 누구의 속성일 수가 없다. 대게의 것은, 판사나 신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비라는 말을 많은 부분에 붙이고 산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음악이 갖는 것은 그래서, 자비의 롯데 캔슬 행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우리의 처음 콩깍지는 자비가 있다. 자비는 누구의 속성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부분 자비를 몸에 마음에 그리고 자주 쓰는 문장에 품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교회에 가서 목사나 신부 스님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들의 은사슬들을 tv 캠페인 등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것은 실제이다.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주자가 구속을 당하고 있으면, 그것은 유나이띠드 스떼이츠, 뭔쳐 있는 것들의 연합일 것인데, 대체 그것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를 도저히 사람들의 자비로운 문장들의 연쇄에서 찾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석재 철학과 교수가 서양 근대 철학을 강의할 때는 봐줄 만 했다. 옛날, 학습에 철저했던 사람이라면, 일억 주고 강의를 수준 떨어뜨리지 않고, 이석재보다 잘할 수 있겠느냐 하면, 능히 할 수가 있다. 그가 교수가 된 것은, 자기의 의지와, 우연의 인연과, 훌륭한 서울 정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자비의 증거들의 연쇄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폭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의 살아 있는 증거는 훌륭한 우리 사는 세상의 상아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학습자들의 두뇌를 풀가동해서 능히 비판할 수 있는, 그렇게 반대로 포장된 철학 상품이라는 것은 향기롭기가 그지 없다. 이펙트만 보자면, 친절한 금자씨탑을 쌓았던 도올 김용옥보다 더 높았지 않나 싶다. 순전 이펙트만 보자면 말이다. 김용옥의 채석장은 다른 데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대신에, 김용옥의 채석장은 오욕을 많이 뒤집어 쓰고 있다. 나와 같은 순결주의자는 그런 것이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철학을 하기 위해서, 오욕을 뒤집어 쓰고 있는 쌈장이 필요로 하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다음 사람이 공자를 가리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금세, 아 이런 것이 자비의 실제이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었다.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말들을 다시금 강조한다.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분명 이명래 고약을 발라야 한다. 우리는 분명 이명래 고약을 발라서 낳았던 적이 있다. 그것의 콘텍스트로서의 사회성은 어마어마해서, 우리가 그것에 종묘 의지하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카시, 당연한 말의 초자아는 분명 사물의 지위에 노출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까지 일치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늘, 노조가 있고, 전경련이 있고, 조용한 매점매석의 나라가 있고, 정경유착이 있는 줄을 안다. 그래서 우리가 현대 물품을 공장에서 쏟아낸다고 해서, 어쩌면 마부처럼도 보이는 사람의 고전 강의가 효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요한 세바스찬 바하, 그 사람이 현대의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이, 지금 나의 문장처럼,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 매점매석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개인의 무자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현대성의 속성과 사물들 사이에서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는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 것이다. 꼬맹이 여성 동지들은 처음에는 수업을 참을 만 하다고 한다. 수업을 참관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사물은 늘 언제나 무한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교육부 장관이나 문화부 장관이 아니면 어쩌지를 못하는, 세워놓고 보면 어쩌지를 못하는 오브제를 갖고 있으니, 성리학이란 모름지기 오브제일진데, 그렇게 일주일을 넘기게 되면, 다음 주 부터는 스프링이 머리에서 삐져나온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은 외국 문학이고, 그것이 실제로 계간지의 정식 명칭이기도 해서, 가난한 나까지도 사로잡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그것의 포스트모더니즘 특집, 아랍 사람 이합 집산을 이야기하던, 그러다가 데리다 디컨스트럭션을 다음 논문이 합시코드 절정의 화음으로 때릴 때는, 나는 내가 그들 초절기교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작품 비평의 옷을 두껍게 입지 못한 게 한스럽기 그지 없었다. 외국 문학이 아름다운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일본의 늘 정치적 망언들이 아름다운 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외국 문학이 아름다운 것이 한국 문학을 업수이 여기거나, 외래어종 때문에 국내 어종이 씨가 말라간다는 것은, 정확하게는 비유가 맞지 않는다. 소나무가 재선충병 때문에 말라가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절대 타자라는 신학 용어에 매혹 되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백제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고구려의 논리들로 탄탄하게 증명될 때에는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나 절대 타자는 지독한 고독과 성리학적으로 일치할 뿐, 내가 아닌 것으로는 이도저도 아닌 것인 것이다. 그것이 이성이든, 정념이든, 절대 타자는 타자가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팀에서 가장 잘 치고,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성이든 정념이든 거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팀내 절대 타자와 마동탁 늘 씨름하지 않을 수 없는 설까치인 것이다. 대게의 학교에서, 교수도 상대적이고, 학생도 상대적이다. 학생이 절대적이 되어서, 교수를 상대적으로 보는 경우는 여간해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진 놉의 딸에서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서늘하게 가리킨다. 내가 만일 체력이 되고, 군대를 세번 온 사람처럼, 일과가 익숙하며, 심지어는 군부대 내의 지휘 체계와도 친척지간에 준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군대 생활은 정말이지 내가 잘 하면 되는 것이다.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아침은 한신대도, 서울대도, 학생 식당에서 혼자 아침을 먹었던 서강대도, 가본 적이 없는 예일대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것의 아침은, 아사, 아사다요, 일본 사찰에 사천왕상으로 비춰져 있는 아사달과 비슷한 것이다.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태어나는 것이 있고, 저녁에 계획한 것을 아침에 실행하려는 것이 있으며, 저녁에 잠깐 자고 저녁 일을 아침에 이어받는 것이 있다. 담합하고, 매점매석하고, 거짓 서류를 작성하고, 소용도 없는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반드시 과자를 사먹고 말겠다는 심보로 백억을 저축성 예금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절대 타자인 것이다. 아침을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오토바이로 출근하고, 대신에 비싼 오토바이에다 빅스들이다. 승용차 출근족 중에서, 오분의 일이 그와 같은 것을 상상해보라. 아사다요, 아사달이다요 이지 않겠는가? 아사달을 우리가 잘 모르니까. 우리가 도다이지 사천왕상으로나 추측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히 한국 땅에 있는 것도 조금 그렇다. 막상 그런 모습으로, 학문적인 절대타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저스 오브 패션 크라이스트처럼, 아침부터 희뿌연 안개로, 황금빛인 묘한 날에, 반짝이고 털장식과 술이 많은 고전 옷을 두껍게 껴입고는, 튜닝이 잔뜩 된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와서, 출석만 부르고, 일어나 떳떳하게 걸어나가는. 그리고 오토바이 소리로써, 그와 같은 작가는 작품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철학적 프래그머티즘. 꼭 문학하는 데서 철학하고, 철학하는 데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순부하지 못할 지라도, 높은 교집합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귀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다. 여간해서는, 문학만 하거나, 철학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연수어 튀김 같다. 문학만 있거나, 철학만 있는 것이 아닌데, 카테고리 알제리 튀니지 할 때, 튀니지 다음으로, 그것이 다만 대학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하며, 그것만을 행하며, 그것만을 실체로 여기는 처음부터 잔뜩 서브스탄스들이 상대적인 교수들 못지 않게 학생들의 시간을 잡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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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내내 보면서, 각도가 다양하다는 것에 놀랐다. 해석의 각도요, 그와 같은 유식은 분명 앉아 있는 한 시간 삼십분을 영원으로 만들어주는 장치가 분명하다. 그 중에 하나는 조관우이다. 나는 영화 보는 끝까지, 그가 조관우인지 실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까, 조관우, 조관우 맞지?! 하는 소리가 입에서 터져나왔다. 왠지 모르게 그립고, 그 시절의 가난을 정발산역처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는 조선대 근처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다가, 만화방에서 고행석 신간을 찾는데, 고행석처럼 생긴 사람이 분명한데, 아저씨가 이제 그런 만화는 한물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뜬금없기도 했지만, 분명 고행석류의 사람인데, 그런 말을 쏟아내니까 너무 얼굴의 핵심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도대로, 고행석을 많이 찬양하였다. 고행석이 어떤 기간이라면,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가 나온 것이 분명히 있었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화 같은 것을 보다가 정신을 문학적으로 차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고행석 같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만화는 이제 한물이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찬양하는 말이라고도 여겼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야한 만화가 많이 있었는데, 그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도 궁금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지, 야한 만화가 하트 오브 다크니스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고행석 만화의 '흑'이라는 것이 좋았다. 그것을 좋아했던 것이 이천이년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이후로는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며, 야한 만화는 하트 오브 다크니스가 될 것 같아도 되지 않는다는 부단한 실험의 연속처럼만 보인다.
'흑'은 분명 코믹과 낭만이 잔뜩 함유된 깡패 만화이다. 나는 나의 '음악헌정'이 행여 그와 같은 내용과 함께 생각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문이고, 예술이고, 나발이고 할 때의 명명론의 스타일의 반복의 아프리오리로서는, 그것의 이름이 있는데, 아무튼 음악가가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두고 음악헌정이라고 하는, 그것의 파괴의 미학을 거짐 세바스찬 바하처럼 동경하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베토벤도, 멘델스존도 있는데, 우리의 논리는 그래서 절대로 바하의 것이 될 수 없고, 이상한 것에로까지 들려올려진 것이 분명한 것이다. 작가로서 아사달의 포즈를 취하면, 나는 음악헌정을 서울대생들이 읽고, 새로운 서브스탄스에 올라서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차갑게, 세렌디피디, 계속해서, 열심으로 공부해서 고작해야 내 작은 공부방에나, 그것도 죽은 다음에나 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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