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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어거스트 에이트(2012)': 몸이 앙드레 가벼운 러시아 지역구 의무방어전

by 마음대로다 2012. 9. 27.

'어거스트 에이트(2012)': 몸이 앙드레 가벼운 러시아 지역구 의무방어전

 

 

 

 

 

 

 

 

서울은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니면 높이 쳐준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가 일본의 해바라기, 중국은 가 본 적도 없는 중역들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단한 경험적인 체적을 갖고 있다. 그것은 뉴스위크나 타임지에서 보았던, 일본의 버블경제와 영문들, 꼬부랑글씨들, 그리고 대단히 아름다운 사진들의 미학의 시간이기도 하다. 회사가 잘되면, 잘되다가 안되다가, 잘되다가,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 회사가 잘되는 것을 계속해서 응원하는 주식전광판의 응시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린아이 때에, 공부를 잘하는 대학생까지만 해도, 전체 회사를 사랑하고, 염려하며, 마음이 상한가를 달리는 그 큰 전광판과 같다 할 것이다. 전철을 타려고 뛰어가고, 어딘가를 가려고 새치기 하고, 새치기 하는 사람을 꾸짖고, 자기는 세 시간은 기다렸다고 뻥치고, 술 마시면 공부 못하는데 마음은 염려하고, 자기 여자 친구가 오드리 햅번이나 올리비아 핫세 같게만 보일 때이다. 정장은 아직 위대한 게츠비의 파탄을 만나지 않았고, 이노베이션은 발음 깊은 곳에서부터 탱탱하다. 상한가. 혹은 상종가. 그것들이 점심 먹으러, 회사에서 똥쏘다져 나올 때를 보면, 최전방, 벌초 하나 만큼은 완전 무결하게 되어 있던 북쪽의 철책 옆으로, 그쪽 군인들이 매우 다종 다양한 옷차림으로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먹기사. 한동안 한국 사람들, 서울 사람들에게 즐겁게 침범했던 줄임말이다. 서울의 누나가, 아파트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먹기사라고 아느냐고 했다. 내가 영화를 보려 한다고 했더니 그랬었나? 자기 친구들과 보았다고 했다. 내가 보았으니, 너는 보지 말라는 분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여간해서는 보지 않을 것이니, 이런 식의 입소문으로 한번 볼 것을 권했던 것이다. 나는 아는 척을 했다. 먹기사? 먹고 기사 쓰고. (사는 뭐지.......) 서울을 가면, 먹고 기사 쓰고, 사는 뭐지 하는 흐름들의 천국이 아닌가 한다. 먹고 기사 쓰고 사랑하고인가?

 

러시아는 차이코프스키라는 굴지의 코스모폴리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소유이다. 배고픔. 대중. 가뇽의 적당하고 수상하며 슬프기 시작하는 음악. 머스크. 석모도. 머리에 흰 사각형의 모자를 쓰면, 경건한 사람인가? 그와 같은, 보기에 따라서는 몹시 하이한 자기 질문들.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보편명제, 근본질문을 상실하고 있다. 그것은 가졌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의 시작이 상실이라는 것이 옳다. 그래도 죽으면 죽으리라, 내 옆에서 연기를 펼쳤던 서울 여자를 보자면, 옛 시절의 인민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하늘 아래서, 저마다 각성제를 먹고 마시고 지냈던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에는 고려인들이 있었다. 빅토르 최. 그리고 한국계 소설가 아무개의 붉은 사과 비슷한 제목의 소설. 그것은 대상성이다. 대상성이 내게서 물어지는 존재의 높은 건물에서, 어거스트 에이트는 옛날 내가 수원에서 보았던 같은 러시아 영화 위선의 태양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시리즈 세 편을 모두 보았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와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노스탤지어라는 영화의 감독, 안드레이.....

 

나는 순간 뭐지? 개그맨의 비슷한 흉내를 내어 보았다. 내가 소설을 쓰기 전, 빌딩들끼리 섹스를 해야 한다는 자기 의무나, 무의식적 욕구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를 떠올렸다. 사랑이 성기와 그것의 배신으로 구성되지 않았을 때의 대기.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서울의 외국어 고등학교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을 배울 때, 배운다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러시아 구조주의자들도 동시에 배웠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상기해보자. 잘 떠오르지 않는다. ... ... . ..... 츠베탕 토도로프. 프로프.

 

 

레비 스트로스.......

 

 

 

 

한신대에서 신학과 친구들끼리, 해당 학자를 연구하면 그것으로 이름을 대신할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몇 명 그렇지도 않았다. 그 중에 한 명이 레비나스였다. 우리는 그를 레비나스라고 불렀다. 억양을 거의 비닐 봉투 터질 것처럼 해서. 레비 스트로스. 스트로스. 그것도 불렀던가? 공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뜬금 없는 말이지만, 인식소가 지적인 흐름을 스스로 확립하지 못하고, 방기 되는 상태. 그것을 프렉탈이라고 하지 않은가? 프릭은 철을 가리키고, 필로소, 탈은 이탈했다고 해서. 그 시절 문창과에 무슨 여름이라고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성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동기 중에도 김여름이 있었지만 걔는 남자였다. 나는 이중 길항 관계를 잘 모를 때였고, 그때 학보에 여름그늘이라는 소설을 응모해서 당선되었었다. 나는 그랬다. 당연히 당선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쁘지도. 안 기쁘지도. 뭐하지도 않았다. 신학과 엘리트가 그 정도는 해야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동기 여름은 자기 그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겠지만, 여자 여름 양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는가? 그리고 자기가 문창과에 다니고 있으니.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 존재는 다이어리 같다. 두 달 씩 함께 있는 칼렌더 같지 않다. 사람의 촉촉한 의식은, 대개 다이어리 같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디.디.디. 학생들은 사실, 졸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소외의 그늘. 여름의 그늘이 매우 깊었던 삼류대 한신대마저, 당연히 그랬는데, 시위의 아름답고 명징한 흐름이 지나고 나면,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 죽었다는 보고가 없는 것은, 법률적이고 의학적인 죽음과 인문학적인 죽음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랑 한 번도 안해보고 졸업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확률과 의지, 지식과 하나님 앞에서도 항거 할 수 있는 생명의 정당성으로 보자면, 나는 일본과 한국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고, 중국과도 놓을 수 있다. 사람은 망설이다가 바다에 빠진다. 망설이다가 그나마 던져준 튜브도 잡지 못한다. 그와 같은 세계가 있다고 내가 말한다면, 어느 누가 믿겠는가? 신지라레. 김종민 코요태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도 극지역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인데, 그래도 우리는 중요한 다른 것을 더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나는 했고.......

 

 

 

했다고, 소설을 꽃피웠었다.......

 

 

킹 솔로몬.......

 

 

 

츠베탕. 주사위 소리 같은 토도로프. 발음으로 보면 러시아 쪽인 것 같다. 그리고 프로프. 그의 민담 연구가 무엇과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결이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에게 킹 솔로몬이 있을 때는 킹 솔로몬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