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데이스타와 로드윈의 엔진이 같다는 것의 불멸의 우연수.......
어떻게 음악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은 한 사람의 소설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읽다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 그것이 갖고 있는 무수한 무신론적 힘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귀가 보석처럼 완전히 막힌 다음에나, 내 생명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다음에나 찾아오실 것 같다.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 이전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 전체에 걸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음악적 해수면보다 거대했던 적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아름답다. 그리고 음악은 아름답다. 그리고 소설은 아름답다. 교육제도는 아름답고, 결혼은 아름답다. 탤런트 장미인애도 아름답다. 그러나, 시카시, 대체, 보카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남녀끼리는 만지는 기능이 있다. 어쩌면, 만지는 기능만 사용하다가, 오후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늙어서 죽는 것인지 모른다. 만지. 만주. 만두는 같은 어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설에서도 무신론적 힘을 가질 수 없다. 음악을 두고는 한번도 그와 같은 카드를 사용한 평론가를 만난 적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위대한 다니엘 드포 평론가를 기억하지 못하고, 셰익스피어 하면 그 평론가가 기억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미쉘 푸코하면, 푸코의 해골을 갖고 놀았다는 무협지적인 상상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인식소. 내가 언덕을 내려갔을 때, 장미인애처럼 예쁜 소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튕기지도 못하는가? 가치론적 논쟁을 론스타처럼? 펼쳤었다. 그러나 소는 여자가 아니었고, 나는 다만 무한의 다이아몬드만 보았을 것이다. 몇 걸음 나아가 답답하였고, 서글펐다. 그것은 익숙한 김제의 벽골제로서, 만일 그것이 아니면 달리는 차에 몸을 부딪혔을 것이다. 익숙한 저수지에 몸을 담고, 일어서, 몸을 담고 일어서고 하는 것이 반복된다. 우리는 결혼을 두고 나처럼 평론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다만 결혼이라는 우리말이, 사도바울의 편지와 전선이 일치한다는 것만 저녁 노을처럼 바라다 보일 뿐이다. 운안데자. 찾아보니 운데자가 아닌. 우리에게는 인식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다. 우리는 결혼할 때 인식소를 교류할 것처럼 생각하고, 소망한다. 그리고 삶의 이런저런 부침 같은 것은, 어린아이의 교육이라는 것은, 다만 그것을 장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만일 그런 게 아니라면, 한국 군대를 없애야 할 것이다. 며칠 전의 예비군 훈련장 총격 사건이 그것을 의미할 것이다. 말이 활발하고, 분절이 뚜렷하며, 단어가 사전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아주 어린아이에게도 같은 분절로써 훈련시키며, 뜻을 일으켜세우고, 생각을 일치시킬 것이다. 그녀는 연세대를 나왔고, 단국대를 나왔다. 그러나 서울대를 나온 여자는, 검고 거대한 철판 위를 질주하면서, 저녁에는 우걱우걱 잘 먹고, 데이스타의 엔진과 로드윈의 엔진처럼, 결혼해서도 그와 같은 엔트로피는 유지된다. 단어는 쇠망하고, 입체는 더더욱 남의 것을 의지한다. 사람이 입체가 되면, 그것의 그림자는 실질적인 서울의 건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수학은 가공할 만하고, 편의점의 담배 같은 적들의 윈윈 전략 같은 것이다. 무수한 인터넷의 반면 교사 같은 것들. 우리는 그늘을 통해서, 문자를 익히고, 실어증을 이어간다. 음악은 찬란하고, 빌딩은 갈수록 훌륭한 기능에서 전체주의로 옮아간다. 사람이 한글 워드로도 살고, 마이크로소프트 엑셀로도 살지만, 누군가는 엑셀 그 자체로 자기 함수를 닫지 않겠는가? 배울 때마다, 깜짝 놀라고, 시라소니치게 놀라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놈의 새끼는 우리도 모르는 진주성에 들어가고자 하고, 한국 사람들의 옷을 전부 벗기고자 한다. 결혼을 두고 풍자한 것이래도 좋다. 누가 부모에 대한 효도가 나쁘다고 했나? 아이들을 선하게 키우는 것이 나쁘다고 했나? 어째서 머리로 변비에 걸린 사람들처럼, 아무런 분절도 없고, 빛의 굴절도 없는 것인가 싶은 것이다.
로드윈이 미혼인지, 데이스타가 미혼인지, 장미인애, 말 뜻 그대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오토바이 공방에서, 오랜 말의 습관을 보기 좋게 튜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외국 유학을 간 적이 없지만 영어를 잘하고, 일본어의 좋은 단어를 많이 알고 있고, 중국 여행을 늘 알 수 없는 의무감으로 다녀오는 사람.
그러나 한글의 가나다라가, 자차카타파하이다. 내가 이십사번 국도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한국어의 그처럼 태생적 저주의 결과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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