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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민희시리즈 '밀회'의 클래식 선곡표를 늦은 저녁에 음미하면서.......

by 마음대로다 2015. 5. 28.

민희시리즈 '밀회'의 클래식 선곡표를 늦은 저녁에 음미하면서.......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전곡은 재미가 없다. 슈베르트의 전곡이 모두다 에이스일 필요는 없다. 무한도전에서, 노력하는 멤버들에게, 피디가 시간적인 축지법을 제공하는 멘트이기도 한데, 에이스가 있고, 에이스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 있으며, 처음부터 에이스는 과자나 먹어버려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에이스에 있을까? 아니면 찍어 먹는 커피에 있을까? 정말이지 클래식은 관계의 정점이다. 클래식 드라마가 나오기가 여간해서는 어려운게, 뭐 적당한 관계로서, 아주 정점의 백이와 숙제로서의 피아노 학원 정도로나마 끝나면 상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클래식 음악의 공룡으로 들어가서, 공룡들의 뼈를 일일이, 포도봉봉처럼 다 만지고서는, 어느 사람은 연주자로 성공하고, 어느 사람은 해봤던 것으로 그치는 것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의 시문학 연구가들의 예술그자체론으로서 접근해야할까? 아니면 맑시즘적 비평의 고전적인 형태로서의 변유사유로써 접근해야할까? 예술가는, 그것의 학원적인 바운더리는, 피아노 음악이 처음에는 팽팽했다가, 그것의 여진으로 인해서 우리가 떨리고, 누군가 다시 시작했다가 간혹 관념으로도 끝이 나는...... 아무튼 판타지아.......

 

 

나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그러나 익숙하고. 클래식의 본질이기도 하겠으며, 슈베르트라는 이름의, 무한정의 별 빛들 사이에서 이어지는 별자리의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내용은 젊은 연주자와 나이 먹은 여자의 불륜이라고 들었다. 나는 주제가 클래시컬하지 못하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속칭 고전 음악이 별로 다른 별자리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그 어디에도 있다. 너무나, 그것의 추상적인 진행이, 마침내는 알 수 없는 철학적 논리로까지 나아기기 때문에, 거기에만 맴도는 것 같은 선입견이 있을 뿐이다. 선입견도 주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선망도, 높은 산의 꼭대기에 있는 운무도 일종의 영원한 객체이다. 나는 공부하기가 싫어서, 독서실에서, 공책이나 책의 빈자리에 그런 만화 그림, 동양화필의 그림들을 그렸다. 나중이 되고 나니까, 그것마저도, 훌륭한 성채의 벽돌이구나 했었지, 그때는 그런 그림이 그려진 이발소에 가야한다는 핑계로 도서관에서 나오고 싶을 뿐이었다. 바로 그것의 선. 분명히 내 누나와 친구들이 있었던 삶의 자리. 직업적인 관심. 여자 친구의 재미난 이야기에 대한 지칠 줄 모르던 인터레스트. 에베레스트. 그러나, 아무개 작가의 홍염이라는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빛과 불꽃 그리고 그림자의 세상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금방 우리 자신이 에이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으로 급전?직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직하 이전에, 우리가 기도하면 되는 것이고, 떨어지기 전에 고전의 한 부분이라도 암송하면 되는 것이다. 클래식은 떨리식, 그런 의미지시체를 분명 가지고 있다. 현악기라는 것은, 현상태를 어떻게든지 타고 지속시키며, 사람들의 인적 신뢰 관계를 쌓는다는 의미이다. 관악기는, 관망한다는, 지금 내 표현 그대로 의미이고, 타악기는, 타악기는, 말하기가 송구스러우나, 대표적인 떨리식, 떨어진다는 소리이다. 피아노는 약간, 현악기적 에칭이 있다. 에칭이라는 미술 기법을 언젠가 한번 해보았으면 했으나, 판화의 극세사 표현이라는 것만 알고, 사람들에게 애칭을 붙여주고, 내게도 붙이고 싶은 마음을 달성하지 못하고 삶이 지나는 것 같다. 피아노는 비단 고치들을 엮어서, 함께 어느 특정 공간에서 때리는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현악기? ??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현악기로 아는지 모른다. 그러나 피아노는 타악기이다. 두꺼운 쇠줄을 때리는 것으로서, 때려잡자 간첩, 때려잡자 전두환, 했던 북한 사람이나 전두환의 친척이 듣기에는 약간 피살벌한 것이 있는 것이다. 표현 중에, 위에서 아래로 긁어내리는 것이 전부, 젠부, 때려잡자, 때려잡자, 때려때려잡자, 그렇게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한국말은 피아노를 닮았다. 현악기는, 떨어지는 클래식의 공통적인 운명을 지나는, 코러스의 발생에서 그것의 동시성을 찾아볼 수 있다.

 

 

피아노를 갖고, 밀회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언밸런스일 것이다. 어떤 장생하는 중국 나한이나 스님의 과욕 같은 것이 스며들어와 한국에서 드라마로 꽃이 핀게 아닌가 한다.

 

 

피아노는 남녀 사귐 자체가 밀회라는 소리이다. 우리는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드라마가 연주자의 무공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전체가 다 쉬레알리즘이라는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대충 보자면, 충분히, 한국의 제도적인 클래식 음악의 공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해야 한다. 밀회를 보자면, 사랑은 해야 한다는 것으로 떨어져 흐르는 소면 줄기에, 의미를 실어 담아내는 것 같다. 결국은 우리가 먹는 것은 현악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