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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주자학은 참으로 매력적인 학문이다.

by 마음대로다 2015. 7. 24.

주자학은 참으로 매력적인 학문이다.

 

 

 

 

 

 

 

 

 

 

 

주자학자 중에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다. 주자학은 잃는 것이 없고, 잊는 것이 없으며, 패하는 것이 없고, 지는 것이 없다. 주자학자까지 되기가 필요한 아이템은 참으로 많으나, 억지로,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구하는 것도 또한 많지 않으니, 어느 결에 갖게 되는 것이다. 주자학은 늘 죽음에 봉착하고, 짜증이 일상다반사이다. 죽음으로부터, 잔잔한 얼굴이 나오지만, 잃는 것이 없으니, 그것의 결과는 조금은 서글픔이다. 주자학은 정말이지 클래식과 한국어의 극치이다. 사람이 클래식과 살기가 힘이 든다. 스페이스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래식이 없는가? 우리는 김치를 먹지 않고 살 수 있다. 얼마든지. 애니웨이. 그러나 김치를 먹게 되면, 다만 실질로 먹지 않았을 뿐, 마음으로 많이 먹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치는 기가 막힌 것이다. 사람의 입맛이 멀쩡하게 있는 배추에까지 다다르고, 그것을 적당히 먹기 좋게 익을 수 있게 도모하고, 이런저런 기가 막힌 양념의 조합을, 위대한 유산을, 그레이트 익스펙테이션, 거기에 첨가한다. 사람은 바위나, 풀밭 위에서, 금을 캐내어, 원주민과, 식인종이 있는지 모르는 벌판의 처지를 극복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다. 그것의 편육. 그것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것의 젤리빈. 신데렐라의 열두시 같은. 마치 황산벌 같은. 계백과 김유신 같은. 계백은 죽기 전에 닭 백숙이 먹고 싶다는 적군의 장수. 원래는 아군이었으나, 전쟁에서 돌아와 내전에 돌입한. 김유신은 김치전 같은. 막걸리 같은. 우리가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머리가 잘리는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죽을 때까지 논쟁하는 두 위인. 주자학은 팥죽과 같다. 사람은 팥죽이 된다. 마음이 시금치가 된다. 파김치가 된다. 주자학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학문이다. 그것은 헤겔이 한 말과 같다. 서양은 미래인데, 지금의 우리이고, 동양에서는, 주자학이 스스로의 제한과 한계와 능력 때문에, 한 사람이 겨우 주자학을 했는 것이라고 말이다. 클래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행동은 변화한다. 강도는 칼을 놓고, 천선하고, 이단은 철학 공부를 많이 하여서 본질적인 기독교인이 된다. 여자는 다른 피해받는 여성을 돌보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난다. 클래식을 들으면, 좋은 글이 나오고, 좋은 글이란 창작이 아니라 좋은 조합이기 때문에, 한자와 일본어와 한국어가 그것에 잘 닦인 길처럼 되어 있다. 멀리 있는, 유붕이자원방래, 친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만나게 된다. 주자학이란, 선자에겐 가족이 없다는 모토가 전부이다. 따로 주희의 이런저런 책이 있지 않다. 그래도 주희의 이런저런 책이 있다는 것이, 주자학의 그나마 생멸문이 될 것이다. 또다시 주자학의 스페이스, 벌판이 되겠는데, 벌교, 늘 그런 곳에 주막이 몇 개 있는 것이다. 주막조차 없다면, 우리는 나아가지 못하고, 이도저도 못하며, 목숨을 연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입에 풀칠한다는 말이 주자학의 다른 표현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의 풀은 플라톤의 풀이다. 다른 책들은 주자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주희의 저서는 그러한가? 어찌 그렇겠는가? 서양 철학을 거짐 주얼리마스터하고, 소재지는 극동 삼국인 사람의 뒤틀린 얼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주희의 저서는, 주자어류는 특히, 그것의 요한의 밧모섬과 같다. 선자에게는 친척이 없다는 말. 오늘은 청담동을 다녀오는데, 나는 울지 않는데, 포토샵의 선택 반전 기능처럼, 남들이 쳐 울고 있었는 것 같았다. 위대한 문학가에게는 한국이 없는 것 같은, 물질공세, 물량공세, 외면의 최선 같은 느낌. 아주 신사역까지 찾아 걸어나가느라고, 비도 오는데 죽는 줄 알았다. 교대역에서 서초역까지 금방이고, 아무리 멀어도, 반포역에서 서초역까지도 금방이다. 기분에 그 두 배를 걷는 것 같은데도, 신사역이 주자학의 벌판에서 나타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조금 가다가 금세 내렸다. 왜 이리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주자학의 극치에서는, 모처럼 자기 집에 찾아갔는데, 아내가 다른 여자 같고, 아들이 딴 짓 하고 있고, 일이 있어 삼십 분도 있지 않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피돌로지. 필로소피오브 피닉스, 그러니까 주자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