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2015): 글쓰기는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그래도.....
잘 해낼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잡아주지 않는다. 마치, 버스 안내양이 뛰어가는 학생의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그와 같은 액션 페인팅은 없는 것이겠고, 사람을 가득 채우고, 바깥에서 두 팔로 사람들을 가두는 모습은 있었으리라, 아무튼, 까라마에서도 있는 장면인데, 뒤따라 뛰어가는 학생의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다른 곳으로 뿌리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잡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이데거는 이해의 것을, 정초된 것을 손으로 아포한데니스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뭔 말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데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끔 설명을 했었다. 유도는 우리의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상대방의 도복을 잡는다. 얼마나 상대방은 공부를 많이 한 것일까? 엎어치기. 엎어매치기. 사람의 등판이 매트에 팡팡 소리를 내면서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학교로 간다. 장터의 싸움터에 가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학교에 간다. 우리는 이렇게 거대한 등판 영화를 보면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는 포어한드니스. 그러니까, 내가 상대의 도복을 잡고, 엎어매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데에서는 좀더 포괄적인 인식 행위라는 식이었지만, 다른 데에서는 좀더 언어유희를 끌어들여서, 그렇게 설명하였다. 남녀가 한 사람의 것이거나, 행동이 예측되거나, 아군이라 동일시 되는 사람들의 이념이 반듯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업어매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손을 쉴 새 없이 뿌리친다. 안내양에게 달려 들어 잡아 끌어주기를 바라나, 윤상의 새벽처럼, 멋진 간주 다음에, 남자 노래의 차도남을 과시하는 화용성, 안내양은 우리의 손을 뿌리치고, 우리는 넘어지고 엎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컨디션이 좋지 않고, 글쓰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골리앗이 한 사람으로 있으면,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조금 골리앗들을 여러 명, 좀더 재빠른 사람으로 끌고 오니, 우리는 끝이 났을 것이라고 세상으로 나오다가, 뒤늦게 총알을 맞는, 영화 속의 장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쉬움은 피닉스, 휘닉스, 신휘닉스, 윤상의 후회처럼 막강하다. 감독은, 최동훈은. 사람들은, 돈을 들인 사람들은. 장면장면들이, 아까운 것이, 도리어 이데올로기에 배치가 되는 것이다. 자동소총으로 총질을 하는데, 이제는 알카포네 저리가라이다. 오달수. 그는 마치, 자동소총으로 영화 속에서 빛이 나기를 그렇게 소원하다가, 드디어 직성을 푼 듯 하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고, 우리의 관념은 성공한 것 같으나, 우리의 육체는 라이플 하나 들고 일어설 수가 없다. 음악은 박사와 같다. 음악은, 박사학위를 받고, 분카쿠 하카세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음악이 끝나면, 우리는 얼굴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문학하는 사람이 가장 놀라는, 우리 안의 익룡이, 아픔과 병이 자기에게 도질 때, 글이 잘나온다는 것이다. 나와는 반대인 것이지. 저녁에, 밤이 깊어갈수록, 글이 이것저것 잘 연결이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작품은 시험이 없다. 오직 주례사 비평만 있을 뿐이다. 전지현은 늘 결혼한다. 전지현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깜놀했던 것은, 도둑들에 나왔을 때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도둑들 보는 쓰레기장에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내내바라보다가, 드디어 티비에서 하는 것으로 보았다. 코러스는 필요하다. 다수는 다수이기 때문에, 문장이 불필요하고, 소수는 소수이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다. 다수 속의 소수 의견이던지, 다수들의 철학적 정리라든지, 소수의 죽음을 각오한 주장에서나 우리는 경우 문장을 만날 수 있고, 코러스는 묘하게도 그와 같은 시간에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상의 배반. 이또한 채널이 잘 맞으면, 눈에서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대체, 누가 이런 노래를 작곡하고, 작사하고, 국문학과 학생들을 따로 불러내어 얼차려를 주는 것일까? 끝나고 나서는, 윤상이 소주 한 병과 오징어를 사준다면, 뺨이 얼얼하고, 엉덩이를 잘 못 맞은 것 같아도, 우리는 국문학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권투 선수의 모습처럼, 한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약간, 그것들을 반대급부로 담아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예를 들면, 윤상과 같은 얼토당토 않는 노래의 훈육관이, 서울에서 그냥, 좋은 백 들고, 샤넬 좋아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물질문명으로 문학과의 시간에 말들을 채우는 것을 보다 못해, 거짐 죽을 것 같은 서라벌을, 서라벌 중학교, 연출했는데, 외부에서 조사관들이 와서 자초지종을 물으니까, 자기들끼리 싸웠다고 말하는, 소년국가 같은 정경도 있는 것이다. 철기와 청동기는 우리가 배우기로는 청동기가 먼저이고, 철기가 나중이라고 하지만, 신현균의 고고학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었다. 아주 원천은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철제 천년의 역사 이후에 발생한 것들이다. 그러니 청동기 유적이 있다는 것은 철제 천년의 문예적 반응이요, 뉘앙스인 것이다. 반드시 청동기가 있다. 그것은 철기의 보고이다. 그것은 역사요, 의식의 동시성이다. 청동기는 그래서 더욱 절묘한 녹색을 갖는데, 그것은 분명 실질이기도 하고, 장식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름을 잘 바를 때는, 청색도, 구리색도 있었을 것이나, 그것이 녹이 슬 때는 마치 옥과도 같은 페이드아웃티드니스를 가진다. 우리가 애잔한 느낌을 갖는 것을, 청동기 장식의 시대에서도 마땅한 효과로 가졌던 것이다. 누군가 가진 재산과, 패물, 금괴와 문서, 노비, 그런 것을 모두 팔아버리고, 오직 책과, 흰 옷과, 청동기 갑옷과 무기만을 구입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수관음의 현실, 사회, 개인적인 경험의 나열이 소외의 인간 의식 깊은 곳에 파멸에 이르는 상처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물론, 저 멀리에 있으나,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녹슨 청동기로 무장하고, 훔친 말을 타고, 세계와 전쟁하러 새벽에 출정하는 신라 토용을 하나 상상할 수 있다. 글쟁이가, 도둑이고, 그리고 무장하는 쑥스러움도 있겠지만, 연기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의타기성이라는 것이 전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생멸문의 연속은, 반드시 진여의 세상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한자어의 기도처럼, 잘 지날 수도, 지내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산에 붉은 단풍으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이 데려가는 것으로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백제의 사람들이 제도권에 복속하고, 도리어 후고구려 사람들이 궁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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