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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영화 어벤져스(2012)와 즉자대자적 영화적 무한한 가능성

by 마음대로다 2012. 5. 21.

영화 어벤져스(2012)와 즉자대자적 영화적 무한한 가능성

 

 

 

 

 

 

 

 

참숯총각의 초원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비가 내리고, 중학교 중간고사를 보고 난 뒤, 마치 계급적 유리창 같은 지방 중소도시를 우연히 심부름하는 길에 버스로 지나는 경우, 케이스, 우리는 급격하게 신화에 휩싸이게 되어 있다. 중소 도시의 청년들은 침을 뱉고. 레파토리는 제한적이고, 같은 반응은 무한하다. 어째서 사람은 참숯총각 같은 부분이 있는 것인가? 부분인가? 전체인가? 반대로 치고 들어가는, 귀납법적 부전자전인가? 아니면 무로부터의 창조 같은 전부인가? 영화 어벤져스에서 토르의 번개 망치 장면이, 어쩌면 미라맥스 영화사에서 언젠가 만들고 말겠다는 장면을 영화 내적으로 처음 재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외로움. 낙차나 추방. 앰페도클레스의 신발 같은. 나는 나쁜 놈이다는, 객관적 표현. 영화적. 술집에서 중얼거린 것을 옆에서 기록하고, 그대로, 반영, 영화 산업 전반의 컨베이어 벨트를 거친 뒤에, 번개와 같이 낙인을 찍는.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고백이 너무 길게 이어지는. 그것의 반응만 연결해서 보면, 기독교의 신앙 고백 같은. 반대 급부도 있다. 쓰리쿠션 경기에서, 한 큐에 십수 점을 역전하는 참이슬 같은. 그것은 한국의 약간 사각형 여자에게도 매혹적이고, 미치도록 푸른 하늘만 있는 태평양의 섬 청년에게도 그러하며, 자기 아버지가 컬러오브머니의 남자 주인공 같은 미국의 한 처녀에게도 그러하다. 점수적으로 확신 가능한 것. 심부름 중에, 헤이 부르면서 접근한 남자가, 근처의 커피집에 끌고 가서는 함께 수다 떨고 커피값도 지불하고, 헤어지는데, 수잔이 아닌지, 초등학교 동창, 다시 묻는데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러니까 가볍게 인사하는 중에, 커피집이라는 스펙도 이용하지 않고, 대충 서서 모든 것을, 만남과 헤어짐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형들끼리 소리내어 이야기하는 듯한 영구혁명. 그와 같은 확신. 시적인 가능성으로서의 깊은 트로츠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속촌이 반가운 것처럼, 그들에게도 서부 영화는 반가운 것이다. 영화적 기법으로서의 밤 장면은, 다만 조명을 어둡게 해서 낮에 찍어도 되는. 훗날 보다 정밀한 카메라가 가능해서, 밤의 장면은 정말 밤에 찍게 되었던. 점수는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난생처음 확실한 것으로 배우고, 너무나 가난한 사람은 숫자를 훔치고, 칭찬의 백제에 시달리고, 그것은 영어적 표현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중간중간 점수는 지속가능한 범주로서의 바에서 바텐더에게 술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가장 정다운 것이다. 그것 말고는, 남이 남에게 말하는 것처럼, 예언자는 대언자이기도 하니까, 대언만 대언만 한없이 하는 것일 수 있다. 토르의 초원 장면은, 슬픔의 개인적 트렌젠덴탈리즘이다. 공산주의 문건이 늘 그와 같은 사적 소유를 언급하는 번개 자극. 돈으로 뭘 할 게 없는데도, 돈이 없는. 시력의 나이에 맞는 저감 상태라는 것은, 정말이지 이유 없는 반항의 청년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돼지표 본드라도 사는 것이 낫지 않는가? 혼자 있는 집에서, 이것저것 붙이면서 놀고, 정신도 몽롱하고.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하는, 문학가 같은, 친구 같지도 않는 친구가 너 본드했지 하는 말도 듣고. 그것은 높은 공 스윙 아웃 같은. 미시적으로는 아웃당하는 것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아직도 우리는 놀이친구라는 것. 그것도, 그것도 아니라면, 토르는, 나처럼 그와 같은 존재를 처음 보고 듣는 미국 사람들은 자기는 나쁜 사람이라는 주장의 총체적 확신성에 깊은 매혹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하는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한 학기를 가르칠 수 있다. 미국을 매도하는 말만 하지 않으면, 나는 모든 자유를 갖고 있고, 워낙에 시간이 없어서도 누굴 위해 좋은 말을 하는지 하는 것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토르는 주인공이다. 그것의 집 없음. 다 집 없음의 경쟁을 하고 있는 중에, 이상한 이름의 그만큼 집이 없는대도 가장 집 없는 것 같고 행복한 사람이 없다. 새로운 스케치이다. 가장, 가장 영구혁명이라는 테제에 근접한 원투펀치가 아닌가 한다.

 

앰프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크게 음악만 듣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리고 레드아미콰이어가 하나 있고, 서울대 영문대학원를 입합하지 못한 스펙터즈가 전세계를 횡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