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동경 국제 모토쇼에의 인애적 단상
어째서 나는 돈이 없을까 생각해 본다. 그와 같은 생각이 아름다운 오토바이를 만든다. 현균씨가 올 것 같더니만,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만경강의 너른 들판처럼 회자된다. 그렇다면 마음으로라도 가자. 브나르도 운동. 그것의 건축육면각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좀비영화의 있음으로 해보자. 원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니까 기대했던 것처럼 기계가 작동을 한다. 우리는 일이 있으면 다른 일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일이 없거나, 있어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면 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쓸쓸하다. 우리가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들을 때, 그냥 단순하고 심플하고, 예전에 들은 것 같고, 내 친구 중에 늘 공부는 안하고 하이틴로맨스 소설만 끼고 사는 아이가 있는데, 여학생이 일인칭 화자라면, 그 아이가 아침부터, 수업이 끝나는 오후까지 자기를 견디고, 세상을 버티고, 과자를 한 봉지 먹고, 엎드려 음악으로 듣는 것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이 어딘가에, 내 마음의 호수처럼 흐를 것이라는 믿음. 관상 기도. 한국에서는 사회부적응자이나, 일본에서는 알아주는 것이, 경제적인 사회안정망적인 저인망 어선이, 지나치게 먹을 것 사는 세상을 타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오타쿠도 많고, 이사시부리, 시라나이도 많아서, 도리어,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높이 보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맨스 소설은 한국에서는 사회부적응자이나, 일본에서는 높은 귀족의 반열에 있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는 SF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SF는 수천년 전에 공자님께서 다 해먹어서는, 우리는 그런 식의 다쓰베이더의 가상 행성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조차 없다시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우리가 무라카미 류보다 높게 보아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둘은 같은 성분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로맨스 소설의 은혜 때문에, 그나마 세계 문학의 반열에 올랐고, 한 사람은 그것이 없는 관계로, 현대 일본 소설의 데자뷰 그러니까 기시감이 되는 것이다.
*
내가 꿈꾸는 세계는 태국이다. 비엔남이다. 전체 대중 교통이 아닌 출퇴근자는, 그리고 연봉이 오천만원 이상인 사람부터 무조건 리터급 오토바이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것은 권고사항일 뿐, 강제 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그러나 회사가 도산하고, 주저 앉는 것이 그때문인가 뒤늦게 그 권고사항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불러, 엔트리를 채우는 것이다. 젊은 청년은 회사에 들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초지종을 잘 모르지만, 대충 짐작하는 것과 맞추어 보아서,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그는 씨비천백이엑스를 살까? 아니면 신형 야마하 삼륜차를 살까? 동경 모터쇼에까지 건너가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삼륜차를 사면 회사에서 반대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걱정할 것이다. 과연 오토바이가 생명이고, 자동차는 죽음인가?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사는 것이 생명이고, 사지 않는 것은 죽음인가? 나는 도저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힘이 없다. 한국 말은 무엇이고, 일본 말은 무엇인것 같은가? 그것은 카이저 소재. 소재주의이다. 우리는 오토바이의 광택과, 가능성, 웅장한 배기음으로부터 소재주의 결코 본질을 벗어날 수가 없다. Le Piano de Claude. 우리는 위화도 회군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가 말을 타고 마을을 떠나자,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다가 그를 따라 달려가는 현상은 잘 알고 있지 않다. 위화도 사건은 앞뒤가 설명이 되지만, 주자의 말을 타고 떠남이라는 것은 그냥 떠나가는 배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이 그냥 그 정도로 여길 대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몰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학에서 생각을 연마하지만, 배우고 익힌 것이라고는, 익숙한 배수구뿐이라면 어느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이고, 대학 관계자들은, 섹스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좋게 보아주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것에서, 실은 진면목이나, 바른 뜻, 그것의 파생적인 의미들을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아프기 전에, 오토바이를 더러 탔는데, 남원에서 나오다가 사람들이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나를 아이돌로, 혹은 이 나라 화랑으로, 장미인애의 남편으로 보아주는 것 같았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오염일까? 아니면 정식 생산일까? 나는 늘 오염일지라도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그리고 기대에 차지 않으면, 두 눈에 헤어지면 되는 것이 아닌가? 디미쏠로기어룽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도처에 있다. 그리고 디미쏠로기어룽을 행해도, 남는 것이 있다면, 마치 사람들이 알아주는 소금 작은 다이아몬드처럼, 너무 귀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에게 귀함을 받게 되어 있다. 내 생일날 이름을 보자. 생일날이 이름 같다. 일일이륙. 기둥이 시각적으로 분열이 되었고, 그것이 그만, 그 흰 옷이라든지, 머플러라든지, 날개 장식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지 않는가? 우리가 문학을 배우는 것도 같은 방식이고, 철학이나, 기타 모든 공부에서도 익히게 되는 스킬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크롬 장식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일일의 계보이다. 그러나 하는 일은 이륙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병합했다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결합되었다고 해야하는가? 비로 얼룩진 크롬 장식을 여주인공이 닦고, 후쿠오카에서 출발해서, 눈이 내리기 전의 북해도를 향한다. 그것은 결합할 수 없음이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좋은 디자인과, 합리적인 경제 관계와, 친절한 말씨로 결합을 시도한다. 심지어는 눈이 내리는 어려움과 장관 마저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댄스댄스댄스. 더 이상 하루키는 로맨스 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오코......
관념은 더럽고, 생각은 불분명하다.
나는 앙드레 가뇽이 그와 같은 우리들의 그림자를 보둠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키의 소설은 보지 않을지언정, 늘 자주 듣는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관념으로 들어가서 너저분해졌고, 나는 별로 관념이 없는 것 같아서인지, 늘 언제나 동경 모터쇼에의 vip이다. 그러나 그가 용맹정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용맹정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로맨스는 처음부터 매우 강한 영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리가 갖는 보통적인 상식에 대한 의구심인 것이다.
*
인애양의 샾에 연인인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하는 것을 꿈꿔본다. 할리 우크렐레도 늘 언제나 꽃과 닿아 있다. 그것은 때로는 여름 날의 시원한 소나기 천둥 소리 같다. 때로는 근심도 담아낸다. 그러나 우리의 복잡한, 클래식한, 심경에 실질 이기통은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사기통, 그러니까 단기통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에이치투이고, 동시에 씨비천백이엑스이다. 오토바이는 장식 기능이 있다. 로맨스 소설에서 반드시 등장시켜야 하는 아이템이다. 사람들은 미발굴 신라시대 고분에서 오토바이가 나왔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우리의 심상적인 진실이 그것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영화의 슬픈 다중성: 베엠베 2016 스크램블러 & 야마하 2016 엠티텐 (0) | 2015.11.17 |
---|---|
드라마가 설련화가 갖는 의식의 공통분모로서의 반가움, 그리고 헤어짐....... (0) | 2015.11.12 |
코스모 폴리탄은 몇 살인가? 우리 영화 사도와 미국 영화 마션의 길항관계를 두고 (0) | 2015.10.04 |
박기영의 아이드웰트의 전후적인 사랑의 잔혹동시....... (0) | 2015.10.03 |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이고, 국문학이란 무엇인가? (0) | 2015.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