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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드라마가 설련화가 갖는 의식의 공통분모로서의 반가움, 그리고 헤어짐.......

by 마음대로다 2015. 11. 12.

드라마가 설련화가 갖는 의식의 공통분모로서의 반가움, 그리고 헤어짐.......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모든 좋은 범주들은 사실 유혹적이다. 내가 소설가라면, 평론가에게 끌릴 것이고, 소설가 신휘로 모임에 나아갔는데 평론가 A양이 그렇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란게, 다보탑의 항목들처럼, 넣어주는 것이 있고, 거들어주는 것이 있고, 빼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말의 채무를 갖고 사는데, 처음 보는 이의 말을 잘 헤아리고, 잘 넣어주고, 잘 빼주고, 때로는 맥주병을 날으는데 거들어주면 며칠이건 기억하지 않겠는가? 기억한다. O. 기억하지 않는다. X. 누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기억하고, 보고 싶고, 전화번호를 알고 싶고 그런다. 그리고 유유유유라고, 상종, 그렇게 말궁합이 잘 맞는데, 둘이 곧 사귀겠네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상승하는 것이 있고, 날개가 있어서 추락하는 것이 있다. 여자가 그만 남자 친구가 있는 것이다. 그는 건실하고, 튼실하고, 튼튼하고, 체력적으로 살아있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데, 여자는 주자에게 어프로치를 했고, 주자와 사귈 준비가 되어 있지만, 막상 그녀가 사귀는 사람은 주자의 국가적 현상, 그러니까 학습과 제도와 경제와 스포츠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평론가 신현균으로 모임에 나아갔는데, 앞으로 그렇게 구분하기로 하자, 소설가 B양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그녀는 유부녀인지, 미혼인지, 때로는 프랑스 어떤 여자처럼 남장을 하고 있어서 남자인지, 그것은 아닐지라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남편 이야기를 하는데, 누군가 또한 미혼이라고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일본 여자라는 말까지도 흘리는 것이었다. 워낙에, 사람들이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한 사람을 가리켜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적당한 정신병에 걸려 있는 듯 하다. 평론가는 소설가를 숭상한다. 숭상의 높이는 어쩌면 사랑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구멍은 양구라는 영원한 지명처럼, 수백년의 인간의 생명을 상회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에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숨가쁜 두 가지의 구멍에서, 때로는 난설헌으로, 때로는 균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결국엔 설련화라고 하는 흑백영화가 탄생하였고, 비로소, 나운규의 아리랑이 탄생하게 되었다. 드라마 단막극 설련화는 약간 그 시절의 가혹한 구한말을 상기시키는 느낌이 있다. 라쇼몽은 이미 소정치한 내러티브와 음악적 연기적 촬영적 쇼맨쉽에 넘어가는 것 같다. 내가 보지 못한 아리랑과 라쇼몽, 그 두 가지를 엮어보자면, 설련화는 결코 작다, 베들레헴처럼 결코 예루살렘보다 작다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한 몇 부작이 되는 줄 알고, 피곤하여서 일부만 겨우 보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동성애가 나올 때는 얼른 채널을 돌려 생각의 피곤을 피하였다. 모순은 모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어서 남자라고 한다는 것도, 지나치게 의식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하였다. 다만, 양장이라는 것, 정장이라는 것, 그리고 한복이라는 것, 그 모든 것에 우리가 핏하게 잘 맞지 못하는 지속적인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장치라고는 여길 만 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어째서 제일모직 김을 입어야 하는가? 할 것이다. 어느 때는 잘 익은 김 냄새가 옷에서 나기도 한다. 사각형의 얇은 검정색이라는 것은 매우 원인적이고, 재료적이다. 맛있기까지 하니, 대상성은 사라지고, 우리가 입는 양복까지도 그것에서부터 기원하는 것 아닌가 하는 논리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드라마는 중국 드라마 양축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것을 또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담겨진 그릇이 다른 만큼, 원소는 원형에 이르러서, 색다른 고통과 감상을 자아내는 것 같다.


나는 평생을 키 큰 여자와 마음껏? 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평론은 피곤한 것이다. 역시 간증이 재미가 있다. 드라마를 일편만 보고 잠이 들었던 것도, 흰색 원피스를 예쁘게 입은 이지아와 데이트를 하러 나아가는 모습으로다가 내 식대로 상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확인해 보니,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선물하고, 괴롭힘과 왕따가 있었으나, 목숨을 건져 둘이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인 것 같다.


창작과 평론이라는 양구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되는가? 그것은 저녁 드라마를 향해 나아가는 서울 메트로가 아니겠는가? 나의 삶이 장미빛으로 빛이 날 때는, 나 또한 그러했다. 저녁에 누군가 셰익스피어에 육박하는 드라마적 세계관을 갖고 나타나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소설로써, 혹은 평론으로써, 그것을 지지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데이트가 절단났고, 어떻게 하다 보니,


나는 다만 고전주의자가 되어 버렸고,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의 드라마는 왠지 어린아이들이 보면 양축될 것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나 되어버렸다.


*






설련화는 나운규의 아리랑, 구로자와의 라쇼몽의 대를 잊는, 구한말의 참 꽃인 것 같다. 누군가의 마스터피스 같은 느낌은 없다. 워낙에 따오고, 클리쉐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예학적 함정이 분명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서울에서 꿈꾸었던 참, 김정희의 불이선란의 느낌이 있다. 그것의 한자와 난꽃 그림은 하나가 되어 있다. 한자들이 난의 기다란 대 위에서 피어난 향기로운 꽃들처럼 되어 있다.



우리는 늘 얼굴을 씻는다. 소설가의 나이를 묻는 것은 내게도 실례고, 상대에게도 실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