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의 아이드웰트의 전후적인 사랑의 잔혹동시.......
예술을 하다 보면 원석이라는 느낌, 그와 같은 관념, 혹은 집착 같은 것이 생긴다. 왜냐하면 오리진이라는 것은 대게 어렵고, 그것은 정치적인 순교의 그림자일 때가 많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와 같은 양식에 사는 것을 우리는 당연시하지만, 그래도 마땅한 예를 다하지 못할까 하는 조심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성악가의 오리진은 무엇인가? 성악가의 오리진은 무엇보다도 편안함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카페에서, 매실주가 약간 섞인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그렇지 않아도 스파클링, 그것의 커피, 때문에 현실이기보다는 관념일텐데, 콘벌젼스, 일종의 포토샵,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옆에 있는 남자가 손만 뻗으면 뽀뽀도 콘베이어벨트처럼 될 것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그와 같은 문예 평론을 듣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석이다. 성 어거스틴은 플라톤을 좋아하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은 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은 정말이지 읽거나 있거나 말거나 없거나 하는 것들이다. 누군가 성 어거스틴이 플라톤이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소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물을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좋은가? 아니면 플라톤의 리퍼블릭이 좋은가? 성 어거스틴은 성경의 지원을 받는다. 그는 모네의 이삭 줍는 풍경 안에서, 끊임없이 먹을 것을 공수받는 처지의 사람 같다. 상대적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플라톤의 공화국은 마블 홀즈에 있으면서, 쫄딱 굶는 것 같고, 아무 세상에 대한 즐거움도 없이, 지금까지 올림푸스에서 가끔 담배 피우면서 사는 것 같다. 성 어거스틴의 지적은 그것이다. 그러니까 명제나 표제가 아니라, 어떤 슬픈 담배 느낌. 육체적 학대가 아니라, 영적 학대의 느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유혹을 걱정하는 매우 복잡한 페닌슐라 그러니까 반도체의 느낌인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다. 영적 학대라는 느낌은. 그래서 그것의 문답법은 혼잣말의 느낌이 있다. 우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에서, 일부로 굴러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진단이 너무나 슬프기 때문이다. 원석이 무엇인가? 가재가 먼저인가? 아니면 게가 먼저인가? 가재는 결코 먼저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의식이 별로 없다. 다만 게를 보자니까 반드시 가제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있다. 옷과 이불, 가방과 연필이 다 예쁘다. 아무리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코란의 대표적인 미스테리 언급처럼, 하나님에게는 딸이 있는 것처럼, 어여쁜 인격의 처자에게는 분명히 부모님이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을 반길 수 있는 이유는, 그와 같은 판단에서 유랑극단의 배우들이 풀려남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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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중요하다. 만일 딸만 훌륭하다고 하면, 여자만 훌륭하다고 하면, 성격이 사나운 독재자는 주변의 인간들을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이다. 저 멀리에 있는 노동부에 보낼 것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현명한 숨은 기독교인 간신이, 간하여 아뢰기를, 여자가 품격이 있고 말씨가 빼어난 것은 비단 혼자만의 공부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특별히 가르치는 사람이 있거나, 가정 교육의 여력이 없다면 당연히 부모님이 비슷하게 훌륭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부모님과 약간의 친척들을 살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독교인 신하는 다시금 비슷한 논리를 코뮤니티에게도 펼칠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아무도, 어떠한 기독교인도, 철학자도, 신학자도 나의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딸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훌륭한 여자에게는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는 약간 다를 수 있다. 뇌가 여자보다 두 배 정도는 크기 때문에, 영토의 면에서는 화성인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한정된 뇌의, 도토리만한 뇌의 크기의 여자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대신에 그것이 보수적인 정치집단의 게슈탈트가 된다.
박기영의 아이드웰트의 노래에서는 슬픔이 묻어나온다.
어쩌면 그와 같은 자연력이, 조화와 양생, 통일과 비전의 축제랄 수 있는 불후의 명곡 조수미 편에서, 위험한 사랑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성경은 모든 정신의 꽃이자, 시간이다. 독일철학자 하이데거의 명저, 꽃과 시간.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후회 없는 삶이다. 사람은 죽음으로의 존재이다. 죽음으로의 무엇이라고 해야하나? 죽음으로의 시간이 엄밀한 의미에서 맞는 것이 아닌가? 독일철학적 낭만은 존재의 향연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잘 쭈부르크,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만 무조건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암송은 국가의 문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지 못하는 것일까?
1. 암송이 어렵다. 암송이 어렵게끔 집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말이다.
1. 암송한다고 해도, 우산이 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물목을 보고 설명하는 능력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딱 암송만 하게 되는 화석들을 우리는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는 에반젤리컬리즘이다. 그러니까 반젤리스. 그러니까 존은 따로 있는 것이 된다. 그와 같이 되는 것도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1. 성경에서도 분명히 언급했다. 죄다 암송하고, 또한 아부하면서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라고.
1.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같다는 말은, 어쩌면 꽹과리였을 수 있다. 마태복음을 읽으면, 꽹과리가 연상이 된다. 계속해서 친구들과 치면 사물놀이가 되는데, 혼자서 딱 하나 치고, 생색내면, 분명히 그에 맞는 술이 부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기영의 아이드웰트는 그것의 종합적인 원석synthetic gemstone을 지칭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우리의 한동안의 제도권 예술은 그것을 터부시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도라는 시간이 들어가면 금세 부서지거나 녹아버리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기영의 아이드웰트는 그와 같은 또하나의 과정적인 것을 메타하는, 한동한 표현으로 유행했던, 아주 잠깐, 메타하는 느낌을 동반하는 것 같은 것이다. 유식불교라는 것은, 유식이라는 것은 그렇게 유치하지만, 자칫하면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을 실감하여 보이지 않는 형식미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술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유식이 딱 자기 생만큼 따라와준다면, 그런 유한성에 슬픈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겠는가? 만화처럼 덧붙이는 멘트가 아주 좋았다. 어찌 보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케이스인 것인데, 조수미씨도 긴장했겠는데요. 김종서 장군의 말은, 멍청히 다만 좋게만 듣고 있던 이의 가슴을 진시황 자객으로 보내는 것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우리는 어느 때에는 예술이라는 노예에 산다. 자유는 어찌 보면 유식일 때가 많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말은 더 많고, 두서 없이 말을 하여도 그와 같은 슬픈 유식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다. 대신에 대화체도 아닌 이와 같은 글의 화자에게는, 좋아하는 여학생이 옆 자리에 앉은 것 같은, 기적과 같은 저녁 버스의 느낌이 있다. 저녁 바람이 한없이 아름다웠던 영도가 꼭 그랬었다. 어느 때는 거세고, 어느 때는 시원했다. 오늘 이 기분으로는, 알바로 돈을 모으면, 거기서 한 이삼년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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