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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이고, 국문학이란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15. 9. 2.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이고, 국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어느덧 학생 자의식이 늘어났다. 자의식의 크기가 옛날에는 서강대 운동장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의 자의식이 눈 내린 날의 한라산만 해졌다. 사람들은 서강대도 가본 적 없고, 한라산도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를 것이다. 이와 같은 관념의 향기는, 사실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험이 뒷받침해주면, 책을 읽는데, 아내가 맛있는 차를 내오면, 책이 더 책향기 잘 읽히지 않겠는가? 그가 다만 책을 읽어도, 우리나라가 유식 불교를 사랑한다고, 세계 인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넘어진다. 이것은 경험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 것이, 넘어지는 것을 부단히,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일으켜세우느라고 그러는 것일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다 할 때 가장 먼저 다이안 레인, 어찌나 예뻤는지, 줄리 델피, 지아이 제인 데미무어 얼마나 예뻤는지. 우리의 아프리오리는 사실 정확하지가 않다. 일을 하지 않는다 할 때 가장 데미 무어 데미지를 입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월급이 아니라, 아이덴터티이다.

 

 

 

 

 

행간을 수십 개를 내려도, 위의 말은 채워지지가 않는다.

 

 

 

나는 다이안 레인하고 결혼할 줄 알았다. 줄리 델피하고도, 데미 무어하고는 세번을 헤어지고, 세번을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데쓰노트. 혹은 하늘나라 연판장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업이 모호하다. 직업이 없다. 다이안 레인이 부르쿨린의 다리를 보여주고, 줄리 델피가 뽕네프를 보여주고, 그것은 내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한강과 만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한강과 만나서도 그렇고, 만경강, 금강과도 만나서 그럴 것이다. 사람이 어째서, 여자를 만나지 않고, 지역과 만나고, 습지, 뽕, 이미숙, 옹녀들을 만나는 것일까? 변강쇠가 나는 그런 비극인줄 몰랐다. 나의 개인적인 극장, 계림극장에서 보았을 때, 변강쇠가 옹녀와 죽는 것이었다. 나는 문예적인 기법인 줄 알았다. 고전주의라는 것은, 사실 작품 개별적인 비극이 아니라, 학교 제도의 대 선단 엔터프라이즈를 상정하는 것일 것이다. 고전주의가 금지된 장난 같은 것이면, 우리는 실존주의 혹은 낭만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고전주의는 반드시, 문학을 버린다. 그리고 큰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것의 게슈탈트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장미를 보고, 함께 굴러 떨어지는 문화부 장관을 연출하지 못한다. 얼마나, 우리들의 옛날은 우리들을 앞지르고 있는지. 나는 직업이 없었고, 염을 계속해서 내뿜고 있었고, 영화는 계속해서 맞팔을 내뿜고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염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뮤직이 되고 나니까, 그 모든 것이 휘장이 찢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 그러니까 덮여 있었던 것이다. 직업이 갖는 위력, 직업이 갖는 아이덴터티. 참 그것을 인정하기도 그렇고, 인정하지 않기도 그렇다. 이번 영화 그러니까, 치외법권과, 일년 전 영화 기술자들이 갖는 학교 제도와 실제 직업 사이의 길항관계가 그것을 문제시하고, 풀이를 노정한다 하겠다. 둘다 직업이 없다. 경찰직업이 있다지만, 검찰부터, 경찰, 그리고 종교까지도 딱히 직업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들 사기꾼들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그것이 의아스러울 뿐이다.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직업을 연출하지, 실제 직업인들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기술자들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직업들과, 조금도 직업처럼 보이지 않는 부유성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나의 염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국문학을 눈물의 가상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학 권력자들을 사이비 종교 집단의 교주로, 문학과 학생들을 우상추종주의자들이나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 영혼들로. 미술학도들은 아무런 그림자도 갖고 있지 못한, 연애와 슬픔의 한 템포만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거나 꺼내는 사람들로. 둘다 연구하는 사람들일진데, 우리 사는 세상의 물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미술학도들이 시력이 좋다 하겠다. 문학도들은 색맹까지를 의심받는다. 문학도들은 그나마 우상을 추종했다가, 비판적 자의식으로 분투했다가 부침을 거듭한다. 반면에 미술학도들은,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마침내 금고털이나 되는 첫눈이 되고 만다. 그곳에 사회적인 메시지나, 철학적 사피엔스를 담아낼 수가 없다. 쉘링의 전체주의와 비슷해서, 예쁘면 예쁜 여자 친구가 먹어주니까, 개체성의 왕정은 보존되지만, 단 하나의 정치적 성리학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개체성의 왕정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첫상대는 왕정을 뛰어넘는 폭력집단인 것이다. 때문에, 둘 중에 무엇이 낫다, 무엇이 그르다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 갑자기 자라난, 학생에 대한 자의식을 다시금 눈 내린 날의 한라산처럼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우리들의 임무가 그것이다. 미션. 학생들이 돈을 받는가? 학생들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가? 공각기동대 이노센트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인형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습들이, 어쩌면 아파트에서, 국문학도와 미술학도가 세상으로 수직으로 하강하는 출동 장면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백남준을 만나기를 내심 소원하는지 모른다. 미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도 말이다. 이중섭을 만나기를, 이상을 만나기를 속으로는 기도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말씨름을 걸어오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들은 자주 아프고, 가끔 비치는 어둠은 분명 예술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모델 같고, 존재와 시간으로서의 감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천문학 돈을 보태거나, 생명을 운명의 파수꾼이 찾아와 흥정을 요구하면, 내어줄 수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의 객관적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한강을 돌아들어가는 전철 안에서, 인애양을 만나기 위해, 어느 호선의 시작점인 데를 찾아가는데, 풍경이 장관이었다. 내 옆에는 포미닛의 권소현 양 비슷한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부모들이 졸업식날 찾아오고 하는 것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상상했었다.......

 

 

 

 

 

 

 

 

 

 

 

 

 

 

 

 

 

사진 협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