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과 김시습, 그리고 허난설헌이 갖는 시적 시습성.......
허난설헌은 어째서 죽은 것일까?
어느 왕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그것의 소문이 허다한 것일까?
그러니까 계획살인. 우연사가 아니라
밀실살인. 사람은 밀실에 갇히면 죽게 되어 있으니까.
세상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허난설헌의 시를 읽기 전과 읽은 후.
도저히, 불도저, 이 불망귀 같은 인생사에서
난설헌이 죽은 뒤에 사람들은 문제의 피망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김부식의 시를
그의 삼국사기와 읽지 않는다.
김시습의 시를 그의 금호신화와 읽지 않는다.
시는 시대로
왠지 시대로 맞는 것 같은......
김시습의 주변 전기가 더욱 신랄하다 싶다.
왕이 바뀌었고, 나름의 제야에 있던 교양 군주가
실질적인 군주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래서 김시습이 세상과
연을 끊었다고 하는데,
김시습은 자기가 시적 꿈에 낙엽불가소,
그러니까 낙엽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인가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보자. 김시습은 자기 이름에 천착하였고,
천재들은 늘 그러하니까, 자기가 낙엽을 기억하나
낙엽은 쓸 데가 없다고 주전부리를 일삼은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시적 자아,
영원한 자기적인 르네상스를 그냥 혼자 때로는 시적 청중을 상대로
자랑하고 시간을 접은 것 뿐인데
그 말이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조선은 성립하였고
고려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조선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때문에,
그의 삼국사기는 역사서로 읽고, 그의 시문 여기저기 때문에
성립이 자극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난데 없이
시적 자아가 군주의 그림자를 닮은 아무개가
그런 막가파식의 말을 지껄이니 얼마나 신경쓰였겠는가?
마침 활이 당겨진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천우신조처럼
그 자신도 세상을 향해 수양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김시습이 중이 되었다는 애틋한 전기가
조선 전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허난설헌은 독살 당하고,
그의 남매 허균은 정치에 나중에 휩싸이고
또한 능지를 당하게 된다.
무슨 이 나라의 문학의 역사가 이처럼
켄시로 혹은 라오우 대전처럼 되어 있나 싶다.......
나는 언젠가 나를 라오우라고 칭한 적이 있다.
켄시로는 이름이 조금 약간 싫다.
라이더 신켄이라는 별칭도 있다. 그러나 켄시로는
싫었던 것 같다. 캔을 따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어서..... 혹여 그런 느낌을 이름에서 받았는지 모른다.
*
다 내가 나의 시적 세계 안에서
행한 관계의 업적들이다.....
생각의 염주들은
다만 관계가 없을 때는 잘 가보지 못하는
염주체육관일 뿐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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