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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일드 위장결혼 1편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5. 12. 1.

일드 위장결혼 1편을 보고

 

 

 

 

 

 

 

 

 

 

 

 

 

2편은 안볼 계획이다. 세상에 그런 플란이 있다. 일편만 보고 이편은 안보는. 드라마를 우연히 보다가, 이상한 대사들도 마음에 접수가 되고, 그래서 끝까지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그리고 글만 쓰기가 뭐해서, 포토샵을 대충, 사진들을 엮어서 아무렇게나 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에는 좋은 사진들이 많이 있다, 어떨결에 나름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것은 정말 논쟁적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포토샵인지, 어디서부터 영화평인지, 어디서부터 인간인지, 어디서부터 현재인지, 어디서부터 카자흐스탄인지, 어디서부터 아름다운 가뇽의 음악인지, 위의 포토샵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포토샵일까? 우리는 보통 사진관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좋아하는 여배우가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불폭력을 주장하여서, 사람들이 경찰들의 장대를 한 사람씩 나아가서 맞았다고 한다. 사상은 중요하고, 그것은 타지마할 궁전의 회랑과 같다. 사람들은 사상을 다 알고 사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오토바이의 명칭이나, 그것의 부속들을 다 알아야지만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까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과 이해, 그리고 인지는 차이가 있다. 인식은 비로소 분석이 포함된 인지의 총체이고, 이해는 분석이 불가능해서 맞이하게 되는 주체의 피동성일 수가 있다. 그리고 인지는 어. 왔어? 정도이다. 바람 부는 대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도모다치끼리, 다찌마와리끼리, 도리화가끼리, 추우면 춥다 하고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는 것이 인지의 총체인 것이다. 사람들이 인식과 문명에 이르러, 남을 돕고 싶지 않아도 돕고 사는 사람이 되고, 인지의 총체에 머물러 있으면, 그와 같은 관계와 도움의 물결에 휩쓸려 가면서 저체온증을 견디는 슬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낮에도 춥고, 저녁에도 그 아스라함이 그렇게 추울 수가 없다. 나는 애인이 생기면 반드시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 마시면서 만지고 할 것이다. 그것이 다만 개인적인 조건 때문에 발생하는 심리적 기분 탓인지, 아니면 종로 특유의 알 수 없는 황산벌 때문인지 알고 싶어서이다.

 

내가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세상 모든 행복할 수 없는 군중들이 나를 에워싼다. 그들은 웃음이 없고, 행복이 없고, 편지가 없고, 별로 유행하지 않을 것 같은데, 가수 박재상이 이번에 굉장히 괜찮은 리듬으로다가 신보를 낸, 그것의 타이틀곡 나팔바지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있는 것이다. 예쁨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유행하지는 않는. 그와 같다. 스키니도 엄밀히 말해 유행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누가 란제리를 유행이라고 말하는가? 그와 같은 논리와 형식이다. 사람이 걷는 것도 유행이겠다? 사람이 말하는 것도 유행이겠다? 종로에서 졸고 있는 높은 건물들이 다 유행이겠다? 파고다? 유행의 아프리오리는 굉장히 복잡하고, 우리는 아무튼 아이템일지라도 그것을 찾아 뉴욕에까지 가기 좋아하지만, 미치코 뉴욕, 뉴욕에 막상 가면 브로드웨이, 그들의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은 실상 아무런 아프리오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팔바지가 나름은 자기들 세계의 스켈레톤을 찾아가는데, 그들도 대충 나팔바지인 것이다. 공부를 하면 그것들을 한 곳으로다가 모을 수가 있다. 인간 목숨이 파리 같고, 국정원에 준하는 정보국이 하나도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지구 오나니 반대 회의를 갖는다고 한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유화인가? 앙드레 가뇽 elegie. 혹은 쇠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그러니까 서양 문명이 수많은 단축 원인들을 갖고 한계에 노출된 것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예고편을 갖고, 미국 스푸트니크 로맨틱 코메디를 만들어 봐라. 그것이 위장결혼 1편과 같은 먹는 형사 시리즈의 돈까스 같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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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나, 아프리오리, 사람들을 만나서 행하고, 다음 범선으로 도착한 아일랜드를 보면, 그렇게 어려서 들었던 클래식 테이프의 공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어려서 굳어졌고, 자라면서 적당히 엔진을 보어업하는 것으로 밖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 코스모 폴리탄들은 공정하다. 나름 한국주의자이지만, 둘 중에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는 식의 한계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도 재산이 있고, 인물이 있고, 스페이스가 있고, 우리에게서 가져갔으면 가져갔지, 그들에게서 부족한 것을 예상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없다시피 한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가? 내가 일드 배우 아유미 유키를 좋아하게 된 것도, 장미인애양과 손을 한번 그나마 잡아봐서 그런 것일 것이다. 최근에 서울 사는 조카가 결혼을 했는데, 광주에서부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인애양과 결혼할 수 있었던 아프리오리에 내가 휩싸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책들은 대게 장미인애이다. 책들의 볼륨이란 것은 그저 수많은 만만한 것들을 향한 아무런 사회적인 발언이 없는, 아무런 미학이나 권위가 없는, 힘없는 질주이다. 여주인공이 여왕처럼 웃는 것을, 그래보고자 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이기 보다는 너무 무의미한 추종을 탓하는 것 같은, 일종의 아이돌에 빠진 아이들을 훈계하는 말투처럼 들리는 것도 그것이다. 인지의 총체라는 것이 슬픔의 매질이라고 하면, 분석이 철저하고, 그것이 또하나의 유기체로서 진행하고, 은행나무가 마치 자기만의 기억이 있는 것처럼 자생을 해야, 인지의 총체의 세계 안에서 밉지 않는 미소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너무 철저할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소나무처럼 독고 용기라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어째서 잘 웃지 못하는 것일까? 클래식 연주자들이 어째서 실질적인 달변가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문학가가 그들 틈바구니에서 발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우울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음의 진행을 좌우로, 위아래로, 혹은 바이킹처럼 이리로저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흐르는 강물처럼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은 늘 언제나 젖어있다. 그래도 되는 자격증은 있다. 운전면허자격증을 딴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골룸 마이프레셔슬리 없다 싶다.

 

 

 

왕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