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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더 폰(2015): 완벽한 사물에 관한 한 탐구

by 마음대로다 2016. 5. 11.

더 폰(2015): 완벽한 사물에 관한 한 탐구






서울 사람들 중에는 이 영화를 보고는 눈물 짓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부모 같은, 아들 같은, 친구 같은, 식구 같은, 같은 사람들 같은 도심의 주택가가 주인공으로 떡하니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줄여서 사말. 아니 부산에서 찍는 것이 아니면, 나라 사랑의 올로케, 줄여서 올케가 아니면, 거짐 다 서울에서 치고박고 찍는 것인데, 무슨 딱히 서울이 많이 드러나 있다 하는 것인가고 말이다. 그렇다.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의 한계상황. 우리들의 다음 생에서라도 찾아가고 싶은 것들의 나열은 사실 드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있을까? 그대는, 기미, 다시 태어나면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대게가 선진국, 어떤 이는 후진국, 친구로부터 너는 참 취향이 독특하다 말을 듣는, 그런데 딱히 지금으로 보면 선진국 아니면, 일본이나 중국, 일본이나 중국에서 그만 가로막히면, 그럴 만한 마음의 동기가 없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으니까, 다시금 내가 다시 산다면 서울의 좋은 집들 근처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이런 것은 재미삼아 내가 짓는 문장들이지만, 우리가 귀향을 해서, 농촌 주택을 멋지게 짓고 살아도, 다음 생에서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서울의 어느 부촌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런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부촌에서 사는 사람도 그렇게 국회의원 재선과 같은 말을 할 것인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그 안에서 좀더 훌륭하게 살 수 있었는데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비싸고, 무겁고, 잘 모르겠는 자동차를 타고 나가면, 저녁에 들어온다. 반드시 교우를 잘하고, 일을 수준 이상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가?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만남이라는 것은 에버리지가 있어서, 자기 만족도 있지만, 상대성, 사회적인 객관성, 그런 에버리지 같은 것이 있는데,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하고 있고, 남들이 늘 언제나 잘하고, 자기는 그보다 약간 더 잘하는 것 식으로다가. 건국대학교를 나올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전면에 들어선 아파트 건물이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그 넓은 호수와 함께, 약간은 중생대 혹은 백악기 같은 종말론적 비전을 상정한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건국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를 나오는 흐린 날의 풍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뼈로서 상상하는 익룡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포유류라고 생각하지만, 높은 서울 건물들은 대게가 익룡을 닮았다. 공룡의 목소리라고, 과학자라는 것들이 재현하고 나면, 아무개 가수의 소몰이 창법과, 그것의 어원이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염주 목걸이처럼, 모든 것이 한 실에 꿰어져 있는 것 같다. 헤겔처럼 시스템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질식할 것 같아도, 들뢰즈, 그와 같은 현상학적 형이상학이 그렇게 틀린 것만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나열로써 살지만, 형이상학에 대한 비젼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원을 닮은 들뢰즈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우리는 서울의 좋은 주택가를 만나고, 그 안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상상할 때, 시트콤을 보면, 허울 뿐인 것이고, 실제의 주소지는 인문학적 기초가 튼튼한 달동네가 되겠지만, 근사하게, 단정하게, 돌냄새, 나무 냄새가 완벽하게 삼합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나는 사람을 볼 때, 분명 우리는 우리 자신의 훌륭함의 터널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려움의 염주도 있지만, 다시금 훌륭한 한 주를 맞이하는.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아들이 유학이나, 여행, 봉사활동을 다녀왔다고, 인천공항에서 전화하고, 저녁에 집에 오는 풍경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이 스며들어온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런 의미에서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보다 분명한 표현은 하지 못하겠다. 들뢰즈는 그런 것을 못보았던 것일까? 얼마나 강남 사람들은 자식들을 그와 같은 훌륭한 성 안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적어도 자신 만큼, 만들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학생들 중에 강남 사람들이 상당수이다. 학교 가는 길이 멀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서울대학교 학생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 변호사, 조개조개 법조개,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운율처럼, 그런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 형사, 어쩌면 그런 것은 생각 자체가 모순이다. 어떻게 문학을 할 줄 모르는 형사는 흔한 것일까? 어떻게 문학을 할 줄 모르는 목사는 흔한 것일까? 어떻게 외국어를 할 줄 모르는 문학가는 흔한 것일까? 어떻게 일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없는 동양학자는 흔한 것일까? 어떻게 한국학자는 일본에 아는 것이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와 같은 철구가 서울대 바깥, 훌륭한 민주성 언저리 어딘가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상업이라는 것이 고작 그 정도의 지능과 근본적으로 브레인 코리아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황무지였고, 폐허였고, 김억, 백조, 그랬기 때문에, 거기다가 덧붙이는 모든 범주는 그것이 학문이건 상업이건 간에 모스트 에미어블 훌륭한 것이었다. 신중현이 미국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생활도 하고, 명성도 쌓고 했다는 것이 그렇게 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한계에 봉착한 것일까? 그 황금의 머리털은 다 어디가고,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의 경험과, 재산, 역사와 경험들로 인해서, 우리의 익룡이 다시금 익산 방향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목도하게 된 것일까? 나는 어떤가? 나는 털이 없는 이집트 고양이 같은가? 표현에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완벽한 사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투수가 공을 잘 던지면, 포수가 덩달아 신이 난다. 그러나 투수가 공을 잘 못던지면, 덕아웃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평생 덕아웃의 문제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질리는 것이 그 이유이다. 영화 덕후들도 질릴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가에도 해당되며, 그래서 대표작이라고 하는 쓸데 없는 표현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대표작이라는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침내 시궁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아무 것도 아닌 말에, 너무나 위대하고 훌륭한 것들이 실질적으로는 요청이 되고, 그래서 댓가가 혹독한 것이다.  


완벽한 사물이 좋은 사람은 완벽한 사물이 되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최근의 미국의 에스에프를 보면서 갖게 되는 것은, 과연 그와 같은 희한한 욕구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물이 되고, 완벽한 다음이 되며,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을 소망한다. 직접적으로 기도한다. 바람을 피워도 좋다. 정히 어쩔 수 없겠거든. 대학을 가기 전에 뽀뽀를 해도 좋다. 그렇게 사람이 좋겠거든. 바로 그와 같은 언덕의 바운더리가,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서울시의 부요함인 것이다. 왠지 모르게 스토리텔링, 익숙하고, 왠지 모르게 영원히 낯설고, 서울시의 부자들도 다만 생각만 했지, 그런 예쁜 바람이라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상상도 못하는 것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