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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재산 한정과 게토의 세상에 대한 상상력: 육룡이 나르샤 35회를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6. 2. 2.

재산 한정과 게토의 세상에 대한 상상력: 육룡이 나르샤 35회를 보고









천국에도 계단이 있듯이, 지옥에도 계단이 있다. 현생이라는 매생이 국밥, 이현세, 그리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이름 현세야, 우리는 그런 돈호법을 들을 때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우리는 이승엽. 저승사자라는 전설의 고향의 아이템을 좋아했으나, 그것이 사라진 지금, 그렇게 알 수 없는 뉘앙스의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누구는 알비노니인데, 알고 있는데, 알아가는데, 누구는 아다지오, 아직까지도 아다지오라는 말이다. 그 말은 너무 속되다.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없다. 지아조토 아다지오. 우리는 육룡이 나르샤를 보면서, 육참의 지극함을, 그것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옛날부터 본 것이라고 하면, 본 것이다고 동의할 것이나, 안 본 것이라고 하면, 눈을 번쩍 뜨면서, 내 말이 그 말이다고 그 말한 사람의 손을 잡을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의 세계에 하나회라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조금 궁금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번 논문을 읽거나 자료를 찾거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쌍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늘 언제나 두꺼운 잡지의 프라모델 같은 격인데, 누구에게는 그런 겨울 산의 전선이 스산하고, 스잔, 찬 바람이 불어와,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의 심경 같은 것으로다가, 드라마타이즈드 되어 있고, 백색의 분말 아래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학교에 가지 못한 그림자가 첫눈이 내리는 날 여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아무개야 사랑한다 하는 거대 글씨를 남기는 듯한,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의 심경, 그런 것의 체세포인 것을 아는 것으로다가 연속하는 것이다. 학생운동권이 우선이겠는가? 아니면 국정원 체세포가 우선이겠는가? 그것이 절묘하게도, 정몽주와 이성계와 연속한다 하겠다. 학생운동권은 아무런 소스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생라면을 함께 스프에 찍어 먹고, 서로의 손을 호호 불어가며, 버려진 창고에서, 마치 꽃섬처럼 죽어가는 것이다. 땔감을 가져오고, 갈 곳이 생각나는 것은 다른 세상이다. 이상하게 땔감도 없는 것 같고,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 부스러기도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을 가리켜 물물교환, 그러니까 오브젝티브 코렐라티브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변유 사유는 선명하고, 그들의 세계는 지금 인식은 뚜렷하다. 그러나, 그렇게 적당한 캠퍼스를 배경으로, 적당한 가로수, 적당한 자판기 커피, 적당한 술집, 적당한 먹는 술의 조공, 적당한 혼자만의 독서, 적당한 저마다의 항목들을 내어 겨뤄보던 시간들, 아르케, 아가멤논, 아르포스, 그러나, 그것들의 하부토대의 항목과 벽돌들이 빠져나가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배화교의 신도들처럼 모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양적 진화이자, 연대와도 같다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기초 스펙의 아들과 딸들로서, 그곳의 건물이 헐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모임에 공적인 지원이 차단되면, 우리는 금방 디아도라, 디아스포라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얼른 팜플렛은 사라지고, 그것은 트럼펫 피쉬 같고, 김병만, 누군가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으면, 세상 모든 슬픔과 인식소는, 만두들의 수증기처럼, 클래식의 연주회장의 희생물이 되는 것 같다. 배가 고프면 생각이 차단된다. 어째서 그럴까? 여자 친구가 없어도 생각은 차단된다. 그것을 속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들만의 아지트가 없어도 생각은 차단된다. 그러니 학생권에서 생각의 연속이 있다는 것은 신화 중에 신화인 것이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신화입니다. 그것보다 더욱 거대한, 푸른 풍선의 신화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의 흘러나온 기름이, 적정 지식 어떤 것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적인 사회화가 코이카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부국으로서, 모든 생각은 산업화가 잘 되어 있다. 그러니 피에스타, 인식소 같은 것을 계속 끌고 가려한다면, 범세계적인 열대의 공기층을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가장 호응을 잘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중 국가 정보원의 연대인 것이다. 그들은 잘 먹어도 생각이 차단된다는 것을 아는 희한한 종이다. 때로는 유색인종이라는 말이 있다. 잘 입어도 차단되고, 여자 친구를 만나도 생각이 차단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잘 먹는다고 했을 때, 그것이 유다의 배신이 아닌 상태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잘 입는다는 것이 생각을, 자기의 뇌를, 처음에 미문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적선하지 않고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성장의 한계인 것을 성리학적으로 잘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유자들이라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은 비통과 비보를 아는 이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의 지식은 코란에 기록된 바, 일곱 개의 구름 높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이르기까지 잘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성경의 전도서의 문구처럼, 헛됨을 정확히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맥락에서도 가능한데, 북한에서 부유하게 파견된, 그다지 리스크가 큰 공작을 명받지 않는 간첩들인 경우, 그것을 사무라이의 할복 자살처럼 잘 끄집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무탈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면, 자기보다 더욱 정신화가 될 것이라는 남의 믿음을 자기화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완벽한 철물점의 인공위성에 오르지는 못하는 것이다. 도시의 엘리트 집단이, 있지도 않는 국정원 요원이 되는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의 코드네임이 지아조토 아다지오이다. 그것은 남의 자식 나의 자식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째서 멍청한 젊은이들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아조토 아다지오는 조선이고, 그것의 매개로서의 내가 바라보는 순전한 어린양은 고려인 것이다. 그것은 대기업의 젊은 이사도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은 골프를 많이 친다고 해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높이를 알 수가 없다. 때로는 직장도 없는 것 같고, 때로는 아내가 입는 옷 같고, 때로는 무서운 그림자가 혼자 있는 사무실로 찾아오는 철퇴와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먼저의 단계가 없으면, 마지막의 철퇴 같은 느낌이 불가한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의 문장이 음악에는 담겨 있다. 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알겠는가? 우리는 국악을 사랑한다. 우리 민족만큼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거칠고, 성기며, 까부르며, 억지스럽고, 한이 많고, 정이 많으며, 아는 것이 없고, 사랑가를 좋아하며, 심청이 같고, 때로는 다리가 부러지며, 병문안으로 뭔가를 놓고 가면, 민중연대의식이, 그것이 작품의 기원 알파로서의 어떤 사람의 의식으로다가, 재산이 늘어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는 모양인 것이다. 우리들의 아바 아버지는 슬픔의 아르케이고, 그것의 고전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가 않다. 국악이 힘없고, 막걸리 냄새 같고, 얼굴은 매우 바른데, 남자가 벌써 열 명 가까이 되는, 역마살의 느낌을 갖는다고 하면, 비로소 클래식은 동학농민운동을 지낸 다음에, 우리에게, 분명한 이성 세계를 비춰주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름다운 무지한 농민들의 시골 벌판을 사랑한 적이 없이, 클래식의 트럼펫을 과연 불 수 있겠는가? 텔레만. 그러나 이것은 비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만 그 정도의 고민이 있고, 다만 딱 한 명, 정몽주가 참살 당했다고 하는 스캔들 하나 뿐이다. 그렇다면, 밤 하늘의 별보다 많은,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튼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는 것과 어째서 인도유러피안은, 유러피안과 그것과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은,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의 육지의 크기가, 영국에서 이태리만 하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깜짝 놀랄 정도인 것이다. 왕건의 결혼 정책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인식소는 거짐 생식기에 준하는 것이다. 멍청하게 생긴 남자가, 아는 단어도 몇 개 없이, 다만 금력과 정력을 갖고 수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생긴 만큼 아는 것도 많은 남자가, 각종 범주의 탑에 있는 여자들과 다만 길거리에서 이야기만 나누어도 우리는 하는 말이 별 거 없기 때문에, 삽시간에 소문이 도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믿음을 조금은 멀리하는 편이다. 교양으로까지 잘 정련된 것이 아니면, 몸이 아픈 것도 기도로써 낫고자 하는 슬픈 경제 의식의 음각화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정신적 노력도, 문화적 경험도 하지 않고, 다만 돈 놓고 돈만 버는 일은 그렇게 잘하는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 문명이 있고, 세상이 문화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는지는 물어 보는 이도 없고, 질문을 받는 이도 없다. 만일 정확한 계산이 가미가 되어서,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서, 그들의 정신까지도 제한하게 한다면, 돈만 벌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이들은, 아침에 회사로 돌진하는 돼지 새끼들이나 될 것이다. 어째서 벌거벗고, 책상에 앉아있는 지는 서로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책상 서랍에, 여분의 옷들을 비치해 놓는 것이다. 고전의 지식이 어찌 되는 줄을 모르는, 슬픈 아버지의 막걸리잔을 받아본 사람만이, 지아조토의 이성계를 맞아들일 수가 있다. 우리가 비극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정몽주의 말대로, 님향한 일편단심이 기분과도 하나가 될 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