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사는 건축 이야기
건축은 오래 산다. 사람들이 짓밟기도 하지만, 빌둥스처럼, 괴테를 읽어서 뭐, 사람들이 개과천선했다는 그런 미담사례는 아주 지겹다. 하고 많은 글 중에서 괴테를 읽을 것이 뭔가? 뭔가 깨림칙하고, 그 나물에 그 밥 같고, 인지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고, 괴테의 파우스트가 셰익스피어의 것을 인용했다는 것도, 나는 별로 기억이 없다. 괴테 자체가 기억이 없다. 그것들은, 음악이 주자를 썰면서 나온다는 사실을 몰라서 계속해서 서양의 말들이나 채웠을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인문학자들 중에, 소녀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주자가 갈곳을 몰라 거리를 헤맬 때면, 수많은 장년들이 소녀를 소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안소녀라는 과시이기도 하다. 그것의 표현주의를 누가 알 것인가? 사람은 한 상도 못하는데, 소녀는 상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녀와 스크럼을 해서, 비씨씨튜드하는 비천무의 계절을 통과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주자는 낯선 것이 없다. 주자는 방송과 아무런 횡경막이 없다. 방송국 어딘가에 수소폭탄이 있는 것처럼, 영국 사망사고 연구소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주자가 수많은 승용차들이 고용노동부처럼 질주하는 것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는 리얼리즘을 채워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서, 사람이 치여 죽는 장면이 있었다. 남녀가 만났는데, 우연히, 여자가 가려고 하자, 남자가 뒤쫓는다. 어쩐지 도로를 지난다 했더니, 차가 들이받았다. 몇 번을 봐도, 준비된 차량이, 몇 번을 봐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실제의 속도로 사람을 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연기자들은 사고 장면을 먼저 찍고, 나중으로 영화 내용들을 찍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용들을 먼저 찍으니까, 그 사람이 죽어도 영화 감독까지도 신경쓰지 않지 않는가? 며칠 전에는 주인공의 감옥에 갇힌 아버지가 죽는 내용이 드라마에 있었다. 대충 사람이 움직이는 것까지도 우리가 용인하면서 봤었는데, 워낙에 내용이 건축의 다크니스를 갖고 있어서, 하트, 시체까지도 대충 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실제로 중년의 남자 탤런트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갈 수만 있다면, 죽어서 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스모크라는 의미에서의 연기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반영과 서사 뿐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한 말이다. 얼마나 오래된 말인가? 한단고기가 남녀평등 뭐 그런 근대적 문구가 있다고 위서라고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한단고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것이 구한말 바쁜 와중에, 동학이 이상한 말이나 쓰고, 동경대전이나 쓰고 있을 때,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한단고기의 위격은 삼국유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지, 역사서라는 것 뿐이다. 문학으로도, 예술로도, 종교로도 접근하지 못한다. 삼국사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동양 삼국이 모두, 삼국사기를 단지 역사서로서 접근하지, 나주 사람 나관중이처럼, 소설로써 접근하여 훌륭한 아들을 낳지도 못하는 것이다. 도리어 남녀평등이라는 말이 근대적 문구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아까워서도,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기사 쪽지만큼의 불태워진 보물 지도, 조각 남은 화장지, 급하게 적을 일이 있는 주소나 전화번호가 의지하는 소평지, 그리고 그것이 요약이라는 위태로운 목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는 분포를 결성하고, 사병들을 끌어모으고, 조직적인 소녀상을 언제까지고 하고, 다른 소녀상에게 매우 평범한 정신적인 위계도 가르치지도 않고, 넘어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오래 사는 건축 이야기와 진배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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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는 어두운 도시의 오후를 지내는 것일까? 어떻게 우리는 도시에 영화라는 연등을 끝없이 거는 것일까? 교회에 가는 것은 마치, 세월호처럼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목사만 도그마틱하게, 충분히 그런 말로써 그릇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설교를 행하는지 모르겠다. 목사가 도그마면, 신도나 청년은 그 이상을 해야하지 않는가? 칼 바르트의 처치 도그마틱스는 정말이지 먹을 것이 없었을 때의 우리집 풍경 같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고, 유학은 이미 마젤란처럼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교회의 목사들이었고, 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서서 책을 읽고 있으면, 목사님도 누군가를 찾으러 어렵게 방문한 사택 안에서, 우리를 맞이하였고, 서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주여. 그것이 무슨 십자가였을까요? 누구의 얼굴이었고, 누구의 예쁘고 아름다운 콧날이었을까요? 그것이 한국어로 넘어가면, 많이 키가 작아지고, 콧날도 얼짱 각도로 일부러 만들어 보아도 서지가 않는다. 입석대는 입술이고, 서석대는 콧날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남미의 고대 유적이, 뒷배경의 산꼭대기가, 보기에 따라서는 누워서도 드러난 콧날처럼 되어 있다.
서가에 처치 도그마틱스를 가져다 놓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질 뿐이다. 오직 대가만이, 털을 골라줄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의 믿음만 강요할수록, 그것의 독서는 갈수록 요원해진다. 내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 같은, 약간 삼국시대 병증이 있을 것 같은, 요원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남의 여자가 되어 있지만, 갈수록 요원해진다 문장을 쓸 때마다, 강촌을 지나는 경춘선의 풍경에서 그녀의 모습이 터져나온다. 처치 도그마틱스는 바르트가 환생하여 싸돌아다니는 자기 자신도 어쩌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면적이지 못하고, 협박적이고, 전쟁적이며, 기독교 철학적이고, 그것을 어딘가에서, 선셋대로, 미국 어딘가에서 가르칠 만하지만, 미국은 그냥 이말년의 코스프레나 해대는 우파루파로나 그를 쓰레기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코스모 폴리탄들은 더럽고, 햄버거의 포장지만 같고, 그것에 케찹이 묻었는지, 아니면 쏘스가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실질적인 글쓰기에서 아무런 연관을 찾을 수 없는데도, 더러운 전 세계의 화장실 건축의 힘에 빌붙어서, 그들의 발톱 밑의 때의 천국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가고자 했던 곳은, 것은, 서양이 앞으로 천년 안에, 그 이후로도 회복할 수 없는 절정의 것이었다. 우리는 코너코너를 돌면서, 늘 늦추어지는 여자들과 대화하면서, 영화를 이 영화 저 영화 찍으면서, 바보 선언, 겨울 여자, 겨울 나그네, 바보 나그네, 바보 여자, 겨울 선언, 우리가 최전선에서 돌아와서,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멍청하게 읽지 않고, 바보처럼 듣지만 않고, 가고자 했던 곳은 철길 저 끝에 있던 주자의 도시요칸이었는지 모른다. 올드 보이, 그러니까 러브레터를 보면 가슴이 상열하게 찢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문장의 인용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때, 밖에서 한국 문화를 절대적으로 무시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고, 릴케의 시를 윤동주의 소개로 읽고, 볼품 없는 니체를 읽다가 말았던 것은, 다만 지적인 허영이요, 이차 세계 대전의 분풀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실제였었다. 단 하나, 성경과 찬송만 가지고도, 젊은이들은 그와 같은 질주의 클러치를 조작할 수 있었다. 바보 선언이 약간 정말 바보 같으면,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원투쓰리포가 나오면 오죽이 좋은가? 올드보이, 그러니까 러브레터를 보고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주자를 먹고, 차마 그냥 지내지를 못하는 양심의 단지 엑스레이와 같은 복고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이정표대로 가면, 그 옛날에 공부는 안하고, 전쟁도 없고, 포도당과 섹스만 있던 여자들의 마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아프리오리라는 것은, 정말이지 취직이라도 하려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갖고서도 회개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구원은 없다.
그 코딱지 같은 국어, 코딱지로 파다가 내버리는 영어, 한단고기도 그냥 남녀평등하게 읽지 않는 ........
근본적으로 단 한 줄도 읽지 않는, 뱀 같은 너희 불쌍한 인섹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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