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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아주 오랜 옛날에 대한 상상

by 마음대로다 2016. 6. 30.

아주 오랜 옛날에 대한 상상

 

 

 





우리는 배우고, 익히고, 그것을 검증하지 아니한다. 배우고, 익히고, 마구마구 프로야구 즐긴다. 우리는 싸이클롭스라는 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것의 비좁은 토굴의 모습은, 어쩌면 구약의 사울과 다윗의 전쟁에서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비교문학적으로, 그것은, 동굴은 동그랗다는 것도 그렇고, 동글잠이라는 부족 이름도 그렇고, 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굴은, 집과 같고, 천장은 하늘과 같다. 병만족이 돌아다니다가, 근사한 동굴을 만나면, 그렇게 내가 기쁘고 그랬다. 왜냐하면, 집을 힘겹게 지을 필요가 없고, 집을 지었는데 비좁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비가 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것은 일본 사람 이름 다나까 같다. 왜냐하면, 다 낚고, 다 낚이니까 말이다. 연구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말들이 전부라고 내가 뻥을 쳐도, 반기를 들만한 사무총장이 일본에는 따로 없을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그것을 모르고 태어나서, 그것을 모르고, 고질라, 죽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의 하늘은, 옥탑방,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이지만, 왠지 모르게 옥택연, 그것도 한국 배우 이름이지만, 그런 것들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빛깔은 옥과 같고, 그것은 깨끗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옥은, 마음의 감옥, 김원일, 읽어도 기억에 남지 않은 흰 소설과 같은 것이다. 너와 내가 있고, 마르틴 부버 부버, 그것은 서양 악기적으로 숨가쁘게 연속을 연출하는 것과 같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나마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은 어제의 윤도현처럼, 뭔가를 기억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것의 헤테로와 같은 태극의 운동은, 보는 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었다. 나까가이치. 그러니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생선구이를 먹다가, 추가로 시키거나, 구운 것이 있거나 하지 않으면, 늘 나까가이치 부족함을 느낀다. 밥 위에, 생선 살점들이 뿌려져 있고, 어쩌면 생선의 그와 같은 마지막을 즐거워하는 지도 모른다.  삶은 부족한 밥공기의 경향신문처럼, 하강하는 글라이더, 다시금 날아오르는 것인지 모른다. 다쓰케테. 다쓰케테구레. 그리고 카나라즈......



사람들의 관념은 생각보다 힘이 없고, 이와 같은 잡문적인 현상학이나 양명학에 빠져, 평생을 아기들의 조금씩 자라나는 영화,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클래식의 고전주의적인 시간을 훔치다가, 그들을 결혼시키고, 우리 인간은 적당히 망보다가 죽는 것일 수 있다. 다른 것들은 버스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분업으로 치닷는다. 버스가 놀러가고 싶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버스가 길이 좋은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 성과주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성과를 많이 냈는데, 놀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무슨 성과를 낸 것인 것인가? 자세히 보면 경쟁할 때, 이것들이 재밌게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과를 낸 다음에는, 악덕 사채업자나 되거나, 가르치거나 배운 적도 없으면서, 갬블러처럼 까불거나, 편승엽이라는 한국 이름이 가능한 것처럼, 일생을 편승해서 사는 지금의 영국 사람들 같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히스토리 채널이라는 미국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제법 성실하지 않는가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대기업 성과주의라는 말이, 성과를 낸 것으로다가 놀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돈을 갖고 악덕 사채업자로 변신하는 것과는 약간 반대 방향으로, 성과 자체를 내지 못하는 일생을 편승해서 사는, 지금의 영국 사람들 같은, 마야 문명 이전에 있었던 남미 백인 소인국의 지식인이자 민족들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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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갓댐처럼, 스스로 말을 막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욕을 연상시키고, 그와 같은 사람, 아무튼 용도를 알 수 없는, 댐과 같은, 그런 거대하고 육중한 시멘트 건축 구조물을 연상시킨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하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엄청난 이야기가 이것이다. 우리는 갓댐처럼, 침을 질질 흘릴 수도 있다. 먼저 눈이 아주 크고 동그란 백인의 소인국의 대지에다가, 동방박사들이 테오티우호칸을 지어준 것이다. 그것은 선풍을 일으켰다. 선동렬 같은. 아니면 팬이 없는 선풍기 같은. 휘쎈 같은. 아니면 바람아 멈추어다오, 무풍 에어콘 같은. 사람들이 더러 죽기도 했지만, 원래의 풍습대로, 식인이나, 인신공양의 하늘 제사 같은, 그래도 오랜 아름다운 건축의 시간 때문에서인지, 키도 보다 자란 것 같고, 문장도 가을을 넘기는 정도로 아름다워진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나카가이치, 릴리함메르, 일박이일, 무한도전, 있는 것으로도 추측이 불가능한데, 없는 것을 두고는 무로이 신지, 더더욱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의 소인들은 격렬해졌고, 전쟁이나 기아나 질병 등의 죽음의 통계를 상회하는 사건사고의 사망자 수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것을 무마시킬 요량으로, 다른 건축들을 차례로, 남미의 끝까지 지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가운 지방에까지 옷을 입고 진출할 수 있었고, 나름 그들은 독립하여, 아즈텍이나 마야는 한국어적인 어감이 강하지만, 처음으로 잉카라고 하는 스스로도 멋진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농사와 작은 교역으로 연명하는 것이고, 돌을 갈아서, 그것들로 서로 맞춰서 집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디오라고 생각되는 동양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는. 그들은 백인들이었고, 키가 아주 작았다. 그래 놓고 나니까, 백인들의 생명출납부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놀라게 된 것이다. 그들은 듬성듬성한 지중해 호수로 끌려갔고, 진짜 바다를 만나야 한다는 케츠프레이즈, 실제로 대서양의 바다를 끌어당겨, 원래 거기에 거주하고 있던 소인들과 더불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기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목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차원의 미학에 이르러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지어준 것은 그래서 다시금 동방박사들이 되는 것이고, 유럽 아닌 대륙의 이상한 해안선 같은 것들도, 다만 단순한 격려와 독립의 응원을 목적으로 알 수 없는 건물을 지어준 것을 참회한 것으로다가. 그리고 텅빈, 몇 명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는 성적 능력이 왕성한 사람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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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슬픔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어마어마한 수의 백인 소년소녀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강제이주된, 별로 모자라지도 않고, 성적이지도 않았던 동양인들이다. 말도 아주 잘하고. 사람들의 일생은 천장이 낮고, 진리도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어쩌면 일본 사람들이 감탄해 하는 신건지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나니꼬레, 단어도 별로 생각나지 않고, 그것의 콘텍스트는 자기의 진리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그래도 역사는, 잉카가 전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도리어 슬픔을 촉매시킨다.....